[채널리뷰]전하, 수업을 거부하겠사옵나이다

  • 입력 2000년 6월 30일 19시 28분


조선시대 대학인 성균관. 이곳에도 학생회와 대학촌 뿐아니라 수업거부도 있었다.

KBS1 ‘역사스페셜-조선시대 대학에도 학생회가 있었다’(1일 밤 8시)는 성균관 유생들의 생활을 전한다.

성균관의 정원은 200명. 초시에 합격해야 입학 자격이 주어졌고 대과에 합격할 때까지 공부했다. 수업 연한은 따로 없었다. 이들은 모두 국비 장학생으로 기숙사에서 합숙했고 학용품 생활용품에 용돈까지 받았을 만큼 조선의 엘리트로 대접받았다.

실제로 이들의 권한은 적지 않았다.

성균관 유생들은 ‘재회(齋會)’라는 학생회를 통해 유학자를 유생명부(청금록)에서 삭제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은 실제 광해군때 영의정을 지낸 정인홍을 명부에서 삭제할 만큼 실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또 정치가 잘못된다고 판단되면 ‘권당(捲堂)’이라는 이름으로 수업을 거부했고 심지어는 성균관을 모두 떠나기도 했다. 명종때 문정왕후가 승려 보우를 총애해 병조판서에 임용하자 성균관 유생들이 떠나버려 조정이 곤혹스러워 했던 게 그 사례.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왕과 신하들은 유생의 기개와 청론을 높이 사서 ‘강제진압’하지 않고 유생을 설득하려 했다.

‘반촌(泮村)’은 성균관 주변인 명륜동 일대에 세워진 대학촌. 유생들이 이 곳에서 술을 마시거나 장기와 바둑을 두는 등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공간이기도 했다. 유생들은 또 성균관과 인접한 창경궁의 궁녀와 밀회를 나누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균관 유생들은 거의 종일 공부했다. 빨리 대과에 합격하는 것만이 입신양명의 길이었기 때문. 이로 인해 세종때 “성균관 유생들이 기력이 쇠하는 것도 모르고 공부만 하니 걱정”이라는 상소문이 올라오기도 했다.

<허엽기자>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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