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명재/'현대'의 도덕적 의무

  • 입력 2000년 7월 4일 18시 44분


과거 현대그룹을 출입하던 시절. 기자는 한 가지 궁금증을 풀어 보려고 했다. 다름 아닌 ‘과연 무엇이 오늘의 최대 재벌 현대를 있게 했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간단한 해답은 아니었지만 몇 가지로 정리했다. 위기를 만나도 포기하지 않는 불도저 정신, 어려울 때 뭉치는 결속력, 창업자의 과감한 승부욕 등.

이런 것들이 ‘현대 드라마’의 원동력이 된 것으로 비쳐졌다. 적잖은 오점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이런 기질이 한국 경제에 한 자산이 된 것만은 분명하다는 생각도 들었다.이제 기자는 현대 ‘밖’에서 현대를 지켜보는 입장.

올 초부터 이어지고 있는 ‘현대 사태’를 보면서 기자는 현대의 불도저 기질을 새삼 확인하고 있다. 국민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 식대로 밀고 나가는 대담성,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3부자 퇴진 약속, 계열분리를 놓고 안될 줄 알면서도 밀어붙이는 뚝심.

현대는 “이게 바로 현대식이다”라는 말이라도 하고 싶은 걸까. 그러나 그런 항변에는 중요한 한 가지가 빠졌다. 창업자 왕회장(정주영) 그 자신이 말했잖은가.

“나는 불도저지만 무작정 덤비는 불도저가 아니다. ‘생각하는’ 불도저다”라고.

현대에 지금 필요한 ‘생각’은 무엇일까. 그건 과거 흙먼지 이는 모래벌판에서 기업을 일구던 때의 앞뒤 안 가리는 의욕만으론 이제 충분하지 않다는 ‘성숙한 생각’이다.

현대는 누가 뭐래도 한국 재계의 대표주자. 재계 명가(名家)라는 자부심을 가질 만도 하다. 왕회장도 “현대는 국민 경제에 큰 기여를 했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러나 명예와 자부심은 그 뒷면에 ‘책임과 의무’가 새겨졌을 때 공허하지 않다.

영국 지도층은 지위에 맞는 도덕적 의무를 다하는, 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제’로 존경받는다. 현대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지금 국민과 한국 경제에, 그리고 현대 자신에 진정 필요한 건 바로 그것이다.

<이명재기자>m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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