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규민]DJ와 대처의 리더십

  • 입력 2000년 7월 7일 18시 51분


김대중대통령과 영국의 대처총리 정부는 국난을 배경으로 탄생했다는 점에서 공통성이 있다.

70년대말 대처총리가 당선될 당시 영국은 계속되는 경제난과 파업으로 국가의 기능이 거의 마비된 상태였다. 거리에는 치우지 않은 쓰레기가 넘쳤고 병원마다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죽은 사람들의 시신이 늘어만 가고 있었다. 한때 유럽 전체 생산의 60% 이상을 차지하던 영국 경제의 영광은 이미 200만명이 넘는 실업자들의 그림자 속에 묻혀 버린 지 오래였다.

돌아보기조차 싫지만 김대통령이 정권을 인수받던 98년초 우리나라도 나라 전체에 외화가 바닥나는 사상 초유의 경제 위기를 겪고 있었다. 기업들의 도산이 이어졌고 길거리로 내몰려 하룻밤 사이에 노숙자가 된 수많은 근로자들의 한숨 속에 국가경제는 한치 앞이 안 보이는 암울함 그 자체였다. 이처럼 두 정권의 출범은 암흑과 혼란과 절망 속에서 시작됐지만 집권 후 국란 극복의 방식에서는 사뭇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 영국 정부의 최대 고민은 국민의 세금만 끝없이 잡아먹어 재정을 피폐하게 만드는 사양길의 탄광 산업이었다. 대처가 탄광 폐쇄를 결심한 후 그와 노조간의 인내심 싸움은 1년이나 지속됐다. 노정간의 혈전이 계속되는 동안 추위와 혼란 속에서도 국민은 고통을 참아 주었으며 그 결과 영국의 권력은 다시노조로부터 정부로 옮겨졌으며 세계적 조롱거리였던 영국병이 치료돼 이 나라 경제는 거대한 금융 왕국으로 환생할 수 있었다. 대처의 성공은 기본적으로 그의 정책이 국민적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대처총리는 정책 결정전 충분한 검증과정을 거쳐 확고한 명분과 신념을 쌓았다. 두번째, 파업에 대비해 1년 이상 사용할 석탄을 비축하는 한편 노조를 끈질기게 설득하는 모습을 샅샅이 국민에게 알리는 등 사전 준비에 철저했다. 세번째, 노조와의 전쟁을 선포한 후에는 비난과 불평에 굴종하거나 원칙없는 타협으로 사태를 봉합하기보다 갈등의 근원을 도려내겠다는 강력한 리더십을 유지했다.

어느 나라 정부든 이 세 가지 가운데 단 하나라도 결여된 채로 상대와 맞선다면 그것은 ‘정부의 탄압’으로 여겨지고 국가의 장래는 영원히 압력단체의 이해에 종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환란 초기 김대통령은 분명히 비판자들조차 입을 다물 수밖에 없을 만큼 난국을 훌륭하게 수습하는 리더십을 연출했다. 그러나 개혁의 피로감 때문인가 참을성이 부족해서인가, 정부는 언제부터인지 원칙에서 한발씩 물러서면서 골치 아프게 전개되는 현실들과 서서히 타협하기 시작했다.

의료대란 때도 그랬다. 정부가 국가 이익을 위하는 길이 의약분업이라고 확신했다면 그처럼 어설프게 준비함으로써 상대에게 투쟁의 명분을 주고 협상에서 약세를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의사들이 순순히 따랐더라도 과연 7월1일 시행에 아무 문제가 없었을까. 이 게임에서 정부는 확신도 없었고 준비도 안돼 있었으며 고집스러운 리더십도 보여주질 못했다.

금융권과의 갈등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은행을 대형화하는 것만이 과연 부실을 없애 주는 유일한 방법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국민적 공감을 얻거나 끈기있게 노조를 설득하는 모습은 생략된 채 정책은 어느 날 갑자기 튀어 나왔다. 총선전에는 은행 합병이 없을 것이라던 정부가 생각을 바꾼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이 없었다.

은행에 막대한 공적자금이 퍼부어지는 한 납세자인 국민은 자기 방어 차원에서도 금융권의 구조조정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구조조정이 손실 요인을 제거해 부실을 털자는 것이라면 최소한의 인원과 설비 감축은 불가피한데 정부는 노조가 파업을 예고하자 즉각 인원 감축이 없을 것이라고 선언해 스스로 구조조정의 목적과 목표를 부정해 버렸다.

리더십에는 참을성이 전제된다. 명령 하나로 모든 게 해결되던 개발 경제 시대가 아닌 이상 시장 논리로 결과를 얻으려면 갈등은 필연적이다. 참을성이 부족해 갈등이 늘 ‘좋은 게 좋은 것’식으로 덮어지면 충돌의 근원은 제거되지 않은 채 봉합된 상처 아래서는 또 다른 혼란의 씨앗이 싹을 틔울 뿐이다. 또다시 찾아온 난국에서 우리는 김대통령의 대처식 리더십을 기대한다.이규민

이규민<논설위원>kyumle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