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를 둘러싼 주위 배경은 단출하다. 뒤편으로 절벽이 있고 그 위에 뿌리 박고 자라난 나무를 휘감아 내려온 덩굴 몇 가닥과 큰 이파리 몇 개가 보일 뿐이다. 앞에는 잔잔하게 흐르는 물과, 물가에 자라난 갈대 같은 거친 물풀, 그리고 물 위로 솟아난 작은 바윗돌 셋이 전부다.
선비 아래 듬직한 바위는 툭툭 끊어지는 호쾌하고 대범한 먹선으로 윤곽선을 둘렀으며, 아래쪽으로는 시커멓게 거친 바림을 베풀었다. 그 선의 성질은 선비 옷의 윤곽선과 아주 닮았다. 즉 굵었다 가늘었다 변화가 많고 꺾여 나가는가 싶다가는 곧 끊어진다. 특히 선비의 다리 오른편의 바위 형태가 다리 모양과 거의 같아 보여, 화가는 마치 선비가 바위이고 바위가 곧 선비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 아래에 의자처럼 편편한 작은 바위가 하나 더 있다. 누구든지 와서 함께 해도 좋을 공간이다.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는 고요한 그림이다. ‘고결한 선비가 물을 바라보는 그림’이니 고요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바라보는 선비의 시선이 물의 흐름처럼 잔잔하지 않은가? 시선이 고요하고 그윽하므로 그림의 공간은 화면 바깥으로 안온하게 확장된다. 정작 화폭 속에 보이는 공간 자체는 아주 작은데도 느껴지는 것은 제한된 그 무엇이 아니다.
그렇게 보이는 화면의 대부분이 돌이다. 세상에 돌만큼 천성적으로 침묵을 좋아하는 것은 없다. 돌은 태초에 놓여진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서 거센 비바람과 매서운 눈서리에도 꿈쩍이지 않고 소리치지도 않는다. 저 바위를 닮은 노인의 시선을 보면 그 역시 성품이 바위처럼 듬직한 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돌은 흙의 정기가 뭉친 것이다. 그러니 선비 또한 오랜 공부와 수양을 통해서 사람의 정기인 올바른 도(道)를 한 몸에 모두고 있음직하다.
선비는 오늘 한가로움을 얻었다. 그리하여 완전히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 선비가 자아내는 잔잔한 삼매경과 여유와 고요함이 너무 좋아서 나 또한 그림 속의 인물이 되고 싶다.
오주석(중앙대 겸임교수)josoh@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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