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최영해/우리는 '정글'에 사는가

  • 입력 2000년 7월 12일 18시 51분


의사, 은행원, 약사 그리고 그 다음은….

의사들이 국민의 생명을 볼모로 한 파업을 끝내고 ‘밥그릇’을 챙기자 은행원들이 들고일어났다. 구조조정 때문에 동료들이 길거리로 쫓겨났는데 또 구조조정을 한다니 이제는 못참겠다는 얘기다.

‘시장의 힘’을 자랑하던 정부는 의사들의 집단행동에 이어 금융노조에도 손을 들고 말았다. 이용근(李容根)금융감독위원장은 협상을 마치고 나서 “국민생활에 더 이상 불편을 주지 않기 위해서 노조를 설득했다”고 자화자찬했다.

의사는 국민의 생명을 무기로 삼았고 은행원들은 ‘남의 돈’을 담보로 투쟁을 벌였다. 결국 그들이 원하던 것을 대부분 얻어냈다. 은행원들은 ‘자르지 마라’라는 투쟁모토 대신 ‘관치금융 철폐’를 구호로 내걸고 나왔다.

양쪽 모두 정부를 투쟁 상대로 삼았다. 통상 사용자측을 투쟁 상대로 삼는 노동쟁의와는 양상이 다르다. 정부는 국민이 맡긴 재산을 순순히 내주고 말았다.

의사파업에 이어 은행노조 파업이 우리들에게 남겨준 것은 ‘정글의 법칙’이다. 힘의 논리에 따라 강한 자는 큰소리치고 약한 자는 숨죽이며 사는 ‘야만의 시대’가 돌아온 게 아닌가 싶다. 공공의 이익이나 가치, 질서는 사라지고 철저히 자기 이익만을 요구하는 이기심의 사회가 됐다. 은행원들이 남의 돈을 붙들고 파업을 한 마당에 약사가 약을 무기로 투쟁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이 같은 집단이기주의에 누가 멍들었는가. 의료수가 인상도, 은행 공적자금 투입도 따지고 보면 모두 국민의 세금이다. 재정경제부 장관 호주머니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금감위원장이 기분 좋아 한턱 쓰는 것도 아니다. 의사파업과 은행원 투쟁을 경험한 사람들이 너도나도 이익챙기기에 나서지 않을까 두렵다. 어떤 집단도 앞으로는 손해를 보지 않으려 할 것이다. 행여 개각을 앞두고 자리를 보전하려는 관리들이 이런 집단이기주의를 부추기는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최영해기자>money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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