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골이 깊어진 농부와 목장주가 피해 액수를 놓고 2년 동안 법정 다툼을 벌이고 있던 어느해 여름 또 같은 일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배추에 피해가 생겼다.
법에 익숙해진 밭주인은 재빨리 ‘증거보전 신청’을 했다. 오후 3시 밭으로 나간 판사는 진땀을 흘리며 소에 밟힌 배추와 비에 젖어 썩은 배추를 하나씩 골라 나갔다.
오후 6시가 지나고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농부와 목장주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감돌자 피해액 감정(鑑定)을 반쯤 끝낸 판사가 물었다.
“이제 그만 화해하시는 게 어떨까요?”
다음날 두 사람은 나란히 판사실로 찾아가 서로 조금씩 손해보는 선에서 화해를 했다. ‘조정제도’를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송사에 걸린 당사자들은 앙숙이 되게 마련이고 1,2,3심을 거치면서 시간과 돈, 감정(感情)을 낭비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가장 나쁜 화해가 가장 좋은 판결보다 낫다’는 말도 생겨났다.
판사의 중재로 당사자간의 화해를 통해 분쟁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주는 수단이 조정제도다.
법원으로서도 폭주하는 재판사건을 손쉽게 해결할 수 있어 조정제도는 날로 활성화되고 있다.
95년 전국 법원에 접수된 조정의뢰 사건이 2만7771건이었던데 비해 국제통화기금(IMF)경제난으로 소송건수가 사상 최고에 달했던 98년에는 9만5810건으로 3배 이상 늘어났다. 99년 처리된 조정사건 7만8321건 가운데 69%인 5만4519건이 화해를 이뤄 성공률도 높은 편.
일선 판사들은 “당사자들이 법정이 아닌 판사실 등에서 판사에게 억울함과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기 때문에 다소 손해라는 생각이 들어도 조정에 응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95년 지방의 한 도시에서 두 남녀가 시체로 발견됐다. 남자는 농약을 마셨고 여자는 살해됐다. 여자측 유족은 남자 유족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지만 남자가 살인을 했다는 증거가 없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4년 동안 지루한 재판이 진행됐다.
99년 서울고법의 김모 판사는 양측 유족을 사무실로 불렀다. 판사는 우선 여자측 유족에게 “억울하게 죽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며 고개를 숙였다. 반응은 의외였다.
여자의 어머니는 “한 번이라도 그런 말을 듣고 싶었습니다.”라며 눈물을 흘렸다. 그날로 조정이 이뤄졌다. 유족은 권위 있는 국가기관을 통한 ‘명예회복’을 바랬던 것.
조정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당사자의 말을 귀기울여 주고 화해의 분위기를 조성해 주는 판사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법원 내에서 조정을 잘 하기로 소문난 문흥수(文興洙·43)서울지법 부장판사는 “분쟁 당사자들에 대한 ‘애정’과 ‘인내’가 비결”이라고 말했다.
“인간답게 사는 기초는 입장을 바꾸어 생각할 줄 아는 것”이라거나 “뿌린 대로 거두고 최후의 심판은 하늘이 한다” 등은 그가 조정실에서 자주 쓰는 금언(金言)들이다.
각 분야별 전문가로 구성돼 판사의 조정을 돕는 ‘조정위원’들도 한 몫을 한다. 서울지법에서 8년째 의료사고 조정위원을 맡고 있는 치과의사 장광훈(張光勳·51)씨는 “의사가 의료사고 환자들의 심정을 이해해 줄 때 문제의 절반은 풀린다”고 말했다.
“어지간한 심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판사의 합리적인 설득에 마음을 엽니다.”(문부장판사)
<신석호기자>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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