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강운/무책임한 '합병 번복'

  • 입력 2000년 7월 23일 19시 03분


‘새롬기술과 네이버’에 이은 ‘중앙종금과 제주은행’의 합병 무산 소식은 이를 액면 그대로 믿었던 수많은 투자자들을 슬프게 한다. 합병으로 인한 시너지효과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최고경영진의 면면을 떠올리면 울화통이 터진다는 투자자들의 원성이 과장은 아닐 것 같다.

주식투자자들에게 합병만한 메가톤급 재료는 없다. 그런데도 기업들은 ‘합병 재료’를 너무 쉽게 발표한다. 최고경영진의 합병 의사가 확인된 이후에도 합병 조건 및 비율, 경영권문제 등 중대 사안에 대한 최종 합의를 이끌어 내기 전에는 합병 발표를 극비에 부치는 외국의 경우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합병을 번복한 기업들은 구조조정 와중에서 퇴출을 모면하기 위한 방편으로 준비가 안된 합병을 서둘러 발표하지 않았느냐는 투자자들의 비난을 면키 어렵게 됐다. 합병하려고 했는데 서로 조건이 안 맞더라는 식의 무책임한 변명을 해서는 안된다.

한 펀드매니저는 “위기에 처한 기업들이 오히려 시장의 힘을 이용해 시간을 벌려고 하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합병도 따지고 보면 일종의 구조조정이고 시장은 구조조정을 하려는 기업에 대해 일단 기회를 주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최고경영진의 합병 발표는 엄밀히 따지면 공시와 같은 힘을 지닌다. 투자자들은 최고경영진의 공식적인 발표나 해당 회사의 공시를 액면 그대로 믿고 투자한다. 그런데도 ‘조건이 안 맞아서 합병 계획을 포기했다’고 식언을 하면 투자자들의 손실은 누가 보상해야 할까.

투자자들은 회사 책임자들이 공시 번복에 대해 별다른 죄의식을 못 느낀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불성실 공시에 대한 제재 조치는 외국에 비해선 솜방망이라는 지적이 적지 않다. 증시에서 신뢰가 무너지는 한 장기투자는 정착하기 힘들다. 앞으로 구조조정의 와중에서 합병발표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합병 번복이 되풀이되는 한 투자자들의 신뢰를 얻지 못할 게 분명하다.

<이강운기자>kwoon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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