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송대근/한 퇴직법관의 회한

  • 입력 2000년 7월 24일 19시 09분


64년 서울고법원장을 끝으로 법관생활을 마감한 ‘사도(使徒) 법관’ 김홍섭(金洪燮·1915∼1965)판사는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사람이 사람을 재판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법철학자로도 유명하다. 법관 재임 중 ‘무상(無常)을 넘어서’란 수필집을 내기도 한 그는 생전에 “법관들에게 기대되는 것은 소설 속에 나오는 기지나 직관에 의한 천재적인 명판결이 아니라 부단한 연찬과 숙련, 그리고 양심에 따라 이루어지는 판결”이라고 강조했다.

▷한 중견 판사가 20여년 만에 법원을 떠나면서 법관 전용 통신망에 사법부의 어제 오늘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글을 남겨 화제다. 시의 형식을 빌린 ‘나의 길’이란 이 글은 단순한 시가 아니라 일종의 양심고백인 것으로 보인다. 글의 마디마디에 때로는 재판을 제대로 하지 못한 데 대한 회한이 배어 있다. 그는 ‘권력과 돈에 마취되어/길거리를 방황하던 그 시절/사실은 그것이 아니라고/이것이 법이라고/법은 살아 있노라고 단 한번만이라도/조그만 목소리라도/외쳐보았더라면…’하고 절규했다.

▷법관들의 고뇌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얼마전 임기를 마치고 물러난 대법관 6명은 공동 퇴임사를 통해 “국민의 이름으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듯이 급조된 국민여론을 내세워 법의 권위를 짓밟는 사회현상에 (법원이) 냉철한 판단으로 대응할 때도 되었다”고 지적했다. 이를 두고 법조계에선 4·13총선을 앞두고 전개됐던 일련의 사회현상, 이에 대한 정치권의 대응 등과 연관지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법치주의가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민주주의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사법권 독립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사법권 독립의 핵심은 정치권력과 여론으로부터의 독립이다. 전임 대법관들과 한 중견 판사가 너무도 당연한 듯한 이같은 원론(原論)을 되풀이 강조한 것은 아직도 우리 사법부가 갖가지 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이들은 후배 법관들에게 “당신들은 회한을 간직하고 법원을 떠나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신신당부하고 있다. 귀담아 들을 일이다.

<송대근논설위원>dk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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