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외교가]발레리 수히닌 러 公使 인터뷰

  • 입력 2000년 7월 27일 19시 17분


러시아인 가운데 한국어를 가장 잘하는 사람은? 선뜻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다. 하지만 발레리 수히닌 주한 러시아 공사(50)를 아는 이들은 서슴없이 “아마 그가 아닐까” 라고 입을 모은다. 그의 우리 말 실력은 러시아 정가와 관가에선 오래전부터 정평이 나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러시아 최고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담을 가졌을 때 통역을 맡았던 사람은 평양 주재 러시아 외교관이 아니라 바로 그였다.

그는 노태우―미하일 고르바초프(90년), 김영삼―보리스 옐친(94년)회담 등 한―러 정상회담이 열릴 때마다 대부분 통역을 맡아 매끄럽게 처리해 냈다.

김일성 북한 주석이 84, 86년 모스크바를 방문해 콘스탄틴 체르넨코,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만날 때에도 그는 통역을 맡았다. 러시아와 남북한의 정상이 만나는 주요 고비마다 그가 서 있었던 셈.

그는 푸틴 대통령 통역을 위해 15일 북경으로 날아가 다시 기차편으로 평양까지 꼬박 24시간을 쉴 사이없이 달려갔다며 그 느낌을 유창한 한국말로 털어 놓았다. “신의주에서 평양까지 기차 칸에서는 함께 탄 북한 사람들과 얘기 나누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차창을 통해 본 북한의 올해 곡물 작황은 그런대로 괜찮은 것 같았어요. 다만 비가 안 와서 모내기가 좀 늦어졌다고 하더군요.”

그는 김 국방위원장이 푸틴 대통령과의 회담에서도 쾌활한 표정으로 솔직하고 거침없는 말솜씨를 선보였다고 전했다. 김 위원장과 김일성 주석은 부전자전(父傳子傳)이란 말처럼 닮은 점이 많다고 덧붙였다.

“이번 회담에서 김 위원장은 ‘알아보고 차후에 답변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더군요. 푸틴 대통령이 물어보는대로, 아는 한에서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푸틴 대통령이 ‘김 위원장은 현대인이다’라고 말한 것도 그의 개방적인 태도를 높이 산 것 같습니다. 푸틴 대통령도 ‘김 위원장과는 마음이 통한다’고 말하더군요.”

그는 푸틴 대통령에 대한 러시아 사람들의 강한 신뢰를 소개하기도 했다. 러시아인들은 그의 재임기간 동안 러시아 경제를 탄탄하게 만들어 놓자는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수히닌 공사는 자신이 한반도통이 된 것을 ‘팔자 탓’으로 돌렸다. 그는 “그런 팔자를 타고 났기 때문이며 내 팔자를 기쁘게 생각한다. 모스크바대학을 다니던 때 교수들의 권유에 따라 한국어를 전공하게 됐는데 러시아어 번역본 ‘삼국사기’ ‘춘향전’ ‘심청천’ 등을 읽으면서 이상하게 한국 문화에 끌리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68년 평양으로 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5년간 조선어를 전공했다. 그는 당시 은사였던 김영황, 박용순교수 등을 통해 한반도 문화에 바짝 다가섰던 것 같다고 말했다. 모스크바대의 은사인 박 미하일교수는 ‘삼국사기’를 완역해 낸 공로로 KBS로부터 ‘자랑스런 해외동포상’도 받았다고 덧붙였다.

그는 김일성대학을 졸업한 73년부터 평양주재 외교관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서울 근무를 시작한 것은 95년부터라고 한다. 이럭저럭 그가 한반도의 남 북쪽에서 산 기간만 16년째. “백두산 금강산 설악산 등 남북한의 명산도 두루 돌아보았지요. 동해안도 두만강부터 부산까지 다녀봤는데 남북한은 산천부터 너무 닮았다는 느낌입니다. 사람들 말도 사실상 꼭 같고요. 72년 평양에서 살 때 ‘7·4 남북공동성명’이 나와 모두들 통일의 희망에 부푸는 것을 봤는데 올해 남북정상회담으로 통일 열기가 다시 고조되는 것을 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러시아도 남북한이 통일하는 것을 돕고 싶습니다.”

‘끝으로 할말이 없느냐’고 묻자 그는 “7월부터 9월말까지 한―러수교 10주년을 기념해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러시아, 천년의 삶과 예술’을 보러 많이 와줬으면 좋겠다”며 싱긋 웃었다. 그런 뒤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기 어려운 주한외교 사절들에게 주차편의를 좀 봐달라”는 소박한 바람으로 말을 맺었다.

<권기태기자>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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