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최선 다하는 자세로▼
5월 88세로 타계한 현암사 조상원회장. 책 출간시기를 정하듯, “덥지도 춥지도 않은 5월 아니면 10월에 죽겠다”고 다짐했던 그는 말년에 몇 년간 스스로 정한 ‘마감시간’을 지키기 위해 매년 봄을 넘기고 나면 다시 10월까지 살아남기 위한 ‘투쟁’을 벌였다. 그 투쟁의 대부분은 그가 평생 매달려 발간했던 법전의 교정을 보는 일이었다.
지난해 12월 세상을 떠난 편집자 한문영씨는 마감시간을 넘기며 역작을 만들었다. 한국의 국보급 문화재를 총망라해 12권짜리 ‘국보’를 만드는 등 미술책 전문 편집자였던 그는 필생의 작업인 ‘한국서화가인명사전’(범우사)을 만들던 중 불치의 병을 확인했다. 병원 출입을 하면서도 교정지를 차마 손에서 놓지 못했던 책은 결국 유작으로 출간돼 한국미술사의 빈 틈을 메우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무엇이 사람으로 하여금 책에 미치게 만드는 것일까. 도대체 책 읽기가 삶에 무엇이란 말인가. 어머니도 여동생도 굶주림으로 잃고 ‘내 집에 좋은 물건이라곤 오로지 ‘맹자(孟子)’일곱편 밖에 없다’고 했던 조선조 선비 이덕무도 맹자를 팔아 그 돈으로 쌀을 사고는 “책을 읽기만 했더라면 어찌 조금의 굶주림이라도 구할 수 있었을 것인가”라고 스스로를 조롱하지 않았던가(정민 ‘한서이불과 논어 병풍’ 중).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는 또 뭐라고 했던가. 거친 뱃사람들의 선술집에서조차 단테의 문고판을 읽으며 이상과 땀내나는 삶 사이에서 서성대는 젊은 서생에게 “당신의 그 많은 책 쌓아놓고 불이나 싸질러 버리시구랴. 그러면 알아요? 혹 인간이 될지?”라고 일갈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책에 대한 그 비아냥조차 책이 아니라면 어디에서 읽을 것인가.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쳐오듯 시간과 공간의 벽을 넘어 남의 깊고 넓은 사유를 얻어오는 일이 독서가 아니라면 또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책읽기란 일찍이 뉴튼이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멀리 볼 수 있었다면 그것은 그저 거인들의 어깨를 딛고 서 있었기 때문”(‘프린키피아’)이라고 말했을 때의 그 ‘거인의 어깨를 딛고 올라서서’ 먼 지평선을 바라보는 일 아닌가.
▼"더 고귀한 세계가 있다"▼
굳이 의미있는 독서가 아니어도 좋다. 인간에게는 ‘상상력’이라는 얄궂은 보물이 있어서 발은 진흙구덩이에 빠져 있어도 머리 위의 별을 꿈꿀 수 있는 우주적 존재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라면 그 어떤 ‘금지된 책’인들 불온하겠는가. 폭염 속에서 일평생 독서가로 정진한 노교수의 고별강연을, 책 읽는 모든 정신에 바치는 격려사로 다시 새겨 읽어본다.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우리가 알고 생각할 수 있는 세계보다 더 높고 더 고귀하고, 더 성스러운 세계가 반드시 있습니다.”(박이문 ‘나의 출가’ 중)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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