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숙한 목소리였다. 모든 국민은 긴장했다. 이어 폭탄선언이 나왔다. 핵심은 채무를 동결한다는 것. 채권자의 돈 받을 권한을 일정기간 박탈해 버렸다.
빚에 허덕이는 기업들에 숨통을 틔워주자는 취지였다. 70년대 초부터 세계경기 불황에 따른 수출부진과 기업도산 위기에 처해 있던 한국경제 회생을 위해 박 정권이 내던진 승부수였다.
이 정책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상당수의 학자들은 당시의 조치로 기업이 살아나 경제위기를 극복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이 조치는 채권자(국민)의 재산을빼앗아 기업들에게 나눠줬다는 점에서 ‘폭력적 관치 경제’의 전형이었다는 것. 또 빚을 많이 얻고, 방만하게 경영한 기업일수록 많은 이득을 봤다는 점에서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의 원조라고 부를 수 있다. 무조건 빚부터 얻고 보자는 기업들의 방만한 경영은 이 때부터 싹이 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3조치의 주역은 당시 경제정책에 관한 실권을 행사하던 김정렴 대통령비서실장이었다. 최초 아이디어는 전경련 김용완 회장에게서 나왔다. 실무 기안작업을 맡은 이는 김용환 청와대 외자담당비서관. 이헌재 현 재정경제부장관도 재무부 금융정책과장으로 참여했다.
정부가 만든 경제백서에는8·3조치에 대해 “고금리 등 우리나라 산업의 구조적인 애로요인을 근원적으로 해결함으로써 70년대의 지속적 성장기반을 확고하게 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강철규 서울시립대 교수는 “8·3조치는 한국경제에 관치주의와 모럴 해저드라는 부정적인 유산을 남겨놓았다”며 “다시는 반복하지 말아야 할 정책”이라고 밝힌다.
기업들의 결합재무제표가 최근 발표됐다. 대부분 빚투성이다. 28년 전 8·3조치의 유산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다.
<이명재기자>mj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