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조명철/독점적 통일논의 더는 안된다

  • 입력 2000년 8월 17일 16시 04분


8월 15일 한 방송사의 스튜디오에 앉았지만 정작 할 말을 잊었다. 그 어느 때보다 할 말이 차고 넘칠 줄 알았는데 서로 부둥켜 안고 목놓아 울고 볼과 몸을 어루만지며 통곡하는 장면 앞에서 나 자신도 덩달아 설움과 감격이 뒤엉킨 벅차오름에 어떤 말도 찾지 못했다. 내 평생 말을 하러가서 말을 못해 보기는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또 평시에 통일이요, 통합이요 하는 말을 나름대로 논리적인 체계를 만들어 해왔지만 이번처럼 어떤 논리적인 설명 없이도 남북화해와 통일이 절박하고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처음인 것 같다.

그만큼 이번 남북 이산가족의 애끓는 만남은 우리 사회에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듯 싶다. 통일이 과연 무엇인가. 부강한 조국, 경제영역의 확장, 자유와 풍요의 사회 등 이런 것들을 더 잘 이루기 위해 통일을 해야 한다고 외쳐왔다. 그러나 상봉을 보니 통일은 거창한 구호나 논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작은 것들 속에 있음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통일과정에서 좀 못 먹고 못 살면 어떤가. 그 아픔이 이산가족의 애끓는 설움과 통한보다 더 아플수 있을까. 대결과 대립, 전쟁으로 동족을 죽이면서까지 한 체제가 다른 체제를 눌러 얻는 승리의 기쁨이 오늘의 이 소박한 만남보다 더 기쁠 수 있을까. 이런 자그마한 한조차 풀어주지 못하는, ‘아름답고 가슴벅차게 하는’거창한 통일논리가 과연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거창한 통일 논리를 실현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작은 것들을 희생시키기보다 작지만 절박한 것들을 실현하기 위해 이제는 거창한 통일논리가 뒤로 밀려지는 것이 더 인간적이고 인도주의적이며 현실적이지 않을까.

통곡하는 그들을 보노라니 남북한의 통일론자들이 야속한 생각마저 들고 그 속에 내가 있는 듯하여 부끄러움을 금할 수가 없다. 그들이 체제우월성을 떠들고 각기 자기의 통일방안을 절대시할 때 이산가족들은 만남을 뒤로 한 채 기가 죽어 지내오지 않았던가. 대립과 대결이 심화될수록 기가 죽어가는 남한 출신이고, 북한 출신들이다. 대립이 심화될수록 부모 처자 형제 자매가 사는 상대방 체제를 비판하는데 ‘동원’돼야 하고 ‘동원’되다 보면 그리움의 오열이 격분으로 바뀌고 더욱 더 상대방을 공격하는 행태로 상승하곤 한다.

그래서 본인들의 소박한 희망보다 자기가 발붙인 그 땅의 이념에 더 충실한 사람으로 보이기도 하고 그 결과 대립정치에서 ‘요긴’하게 쓰이는 ‘귀한 사람’으로까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서울에 온 나의 스승님들, 지난날 알고 지내던 북측 이산가족들의 애끓는 상봉 장면을 보면서 이제 더는 이들의 가장 깊은 곳에 잠겨있는 당연하면서도 소박하고, 크지 않지만 모든 것에 앞서 꼭 이뤄주어야 할 소망을 청산유수 같은 미사여구를 써가며 억누르고 외면하거나 미루지 말아야 함을 느꼈다.

그들에게 두 지역 제도가 이념과 사상의 굴레를 얼마간이나마 벗겨주면 그들 모두는 순수한 과학자요, 의사요, 역사학자요, 관료일 뿐이다. 그래서 대화도 쉬워지고 어색한 행동도 사라질 것이며 두 지역에서 공히 쓰이는 인재들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또 모두가 많이, 자주 만나면 남북 이산가족의 상봉이 이번처럼 세계가 대서특필하는 특별한 행사가 아니라 조용하면서도 눈물없고, 농담도 해가면서 웃음이 나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사가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그 이해에 기초하여 서로가 편안하게 통일방안도 논의해가면서 만남이 더 유익하고 실익이 있는 행사로 발전되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남북 기득권의 독점적 통일 논의가 아닌 일반국민이 하는 통일 논의이고, 그것도 얼굴 맞대어 가면서 얼굴 따로 마음 따로가 아닌 안팎이 같은 진정한 국민통일논의가 아닌가 생각한다.

아무쪼록 이번에 서울 오신 나의 스승님들과 이산가족들이 남녘 사람들의 가식없는 말과 행동 속에서 진정한 동포애를 느끼고 가감없이 북녘의 민중에게 전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면서 부디 몸성히 귀환하시기를 충심으로 빌어본다.

조명철(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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