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김병종/말의 폭력 말의 타락

  • 입력 2000년 8월 23일 16시 20분


우리는 이 여름 '어머니' 한 마디를 부르기 위해 50년의 세월이 걸렸음을 보았다. 외마디 부르짖음 같은 이 한 마디를 토해놓고 차마 그 다음 말을 잊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한 마디 말이 목숨처럼 소중한 그 무엇이었음을 보았다. 그러나 말의 홍수 속에 지금 우리의 언어문화는 타락할대로 타락해 있다.

기차 여행은 나의 빼놓을 수 없는 즐거운 취미이다. 기차를 타고 모처럼 삭막한 도시를 벗어나 들과 산을 바라보며 여행하는 것을 즐기기 때문이다. 시집을 읽거나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면서 휴식을 취하기에 기차여행처럼 좋은 것은 없다.

그런데 최근 기차로 남쪽 여행을 하고 나서 '이제는 나의 기차여행 취미도 막을 내리게 되었구나'하고 생각하였다. 기차의 청결도나 서비스도 옛날에 비해 훨씬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기차여행 취미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만든 어떤 폭력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말의 폭력이었다. 기차가 서울역을 출발하고 나서부터 주위에서 쉼 없이 울려대는 핸드폰 때문에 단 5분도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 좌석 전후 좌우에서 울려대는 핸드폰 소리는 참으로 대단했다.

핸드폰을 자제해 달라는 자막이 떠오르고 방송이 이어졌지만 아랑곳 없었다. 게다가 장작개비처럼 말라빠진 도시락을 씹고 있기도 여간 괴로운 것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이 이 경우 이웃나라 일본의 쾌적한 신깐센(新幹線)을 이야기하곤 한다. 나 역시 얼마 전 일본 교토(京都)와 도쿄(東京)를 두 번씩이나 왕복하는 신깐센 여행을 하고 왔지만 그 여행 중 단 한 번도 핸드폰 소리를 듣지 못했다. 딱 한번 예외가 있긴 했다. 깜박 졸았는가 싶었는데 핸드폰소리가 울렸던 것이다. 속으로 '너희도 별 수 없구나'하고 쾌재를 부르며 눈을 떴더니 동행하던 내 제자의 핸드폰 소리였다.

기차 여행에 실망하여 지방에서 올라올 때는 고속버스를 탔다. 타고나서 10분이 못되어 나는 차라리 기차가 나았다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내 주위에 포진한 3명의 중년 여인들은 거의 고함에 가까운 수다와 핸드폰 통화로 나를 정신없이 몰아 붙였다. 기차보다 훨씬 좁은 밀폐된 공간이어서 괴로움도 더했다. 그 날 나는 그 여인들 중의 한명의 아이가 간밤에 설사를 한 얘기와 남편의 술 주정 버릇과 여고 동창생이 엄청난 수다꾼이어서 얄밉다는 것과 아는 사람이 갑자기 암으로 죽었다는 것과 그러니 우리도 건강에 조심하자는 것과 금년 여름 냉장고를 바꿀까 한다는 것과 가급적 좀 비싸더라도 독일제를 사 볼까 한다는 것과 그럴 필요 없다는 것과 체중이 불어서 큰 일이라는 것과 피하주사로 체지방을 뺄 수 있다는 것과 아파트 아래층에 새로 이사온 젊은 여자가 영 싸가지가 없다는 것과 아이가 다니는 학교 선생에 대한 무차별적인 욕설과 (나도 선생이다) 남편이 요새 밤이면 들어와 안마를 해준다는 것과 같이 볼룸 댄스를 배우러 갈까 한다는 것과 행복해 죽겠다는 것과 그 외에도 기억하기 어려울 정도의 수많은 말을 그녀들의 핸드폰 통화와 수다를 통해 고스란히 들어야 했다.

핸드폰이 울릴 때마다 지금 어디 있느냐는 것과 왜 이렇게 차가 막히는지 모르겠다는 뻔한 말들이 수도 없이 되풀이됐다. 그 말의 홍수 속에 둥둥 떠다니면서 나는 말의 타락을 절실히 경험했다. 예컨대 쓸 말이 단 몇 개도 없었기 때문이다. 말은 본디 '말씀 언(言)'이라 했거니와 이 시대의 말들은 거리에서건 차안에서건 찻집에서건 쓰레기처럼 쏟아지고 뱉어질 뿐이다. '고독해서들 저러겠거니', '사는 것이 힘들고 외로워서 휴대전화기에라도 대고 저렇게 쏟아내야 하는 걸거야'라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여러 사람이 함께 타고 있는 자동차라는 생각 따위는 안중에 없는 듯한 그 시종일관한 태도들은 차라리 경탄스러울 지경이었다.

차가 서울에 도착했을 때 두 아낙 중 하나가 창 밖을 보며 말했다.

"어머, 벌써 서울이야? 모처럼 만났는데 제대로 대화도 못했네. 자세한 것은 집에 가서 전화로 할게."

김병종(화가·서울대 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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