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 한국에서 인턴을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가 의사로 근무하는 정해권박사(내과). 그는 ‘3시간 대기 3분 진료’의 한국 현실과 진찰에만 평균 50여분이 걸리는 미국 병원의 진료과정에 대해 설명하며 이같이 말했다.
정박사가 말하는 미국 병원의 진료순서. 증세에 대한 상세한 문진→과거 병력 및 가족 병력 조사→알코올 담배 마약 등의 복용 여부 조사→체온 맥박 등 기초조사→과거 복용했던 약의 리스트 작성→X레이 검사 결과나 다른 의사의 소견서 검토→추론 가능한 질병에 대해 환자에게 설명→약 처방 및 주의사항 전달.
올 6월 세계보건기구(WHO)는 ‘세계보건 2000’ 보고서를 통해 한국의 의료수준을 세계 58위로 평가했다.
한국은 1인당 보건복지 예산에서는 31위였으나 의료혜택의 공정성과 국민건강 수준에서 각각 53위와 107위를 차지하는 등 공공성 측면에서 순위가 낮아 의료시스템 전반에 구조적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의료체계에서는 가족 중 한 사람이 중병에 걸리면 가정이 완전히 해체되거나 치료비가 없어 치료를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의료보험제도는 일종의 진료비 할인권에 불과한 셈.
의료보장이 민간영역에 맡겨져 있는 미국을 예외로 하면 영국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는 돈이 없어 진료를 못 받는 경우는 상상할 수 없다.
독일 본에서 3년간 주재원으로 있었던 김모씨는 “아내가 한국 같으면 수백만원이 넘는 수술비를 본인이 한푼도 부담하지 않고 수술을 했다”며 “대신 의료보험료가 상상도 할 수 없이 비싸다”고 설명했다. 독일 프랑스 등지에서는 병원에서 발급한 청구서를 보험회사로 보내면 아무리 많은 금액이라도 보험회사에서 전액을 환불해 준다. 안경 보청기 등도 의료보험이 적용되는 것은 기본이다.
한양대 의대 신영전(申榮全·예방의학)교수는 “한국 보건의료체계의 가장 큰 문제점은 90% 이상이 민간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병의원은 시장경제의 원리에 따라 운영되는데 국가가 의보수가를 통제하는 보험제도는 애초에 모순이라는 것이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건강연대 등은 해결책으로 의료의 공공성을 다른 나라 수준으로 강화해야 할 것을 주장하는 반면 의료계 일각에서는 반대로 민간보험이나 비보험제도를 활성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어떤 경우든 문제는 돈이다. 서울대 의대 정도언(鄭道彦·정신과)교수는 “지금처럼 버스 요금 내고 그랜저 타고 싶어하는 국민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며 “최선의 진료를 받기 위해서는 국민 부담 증가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영아기자>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