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의 묘미는 항상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아무리 같은 곡이라도 누가 연주하는가 혹은 어떤 악기로 연주하는가에 따라 그 느낌이 다양한 모습으로 변형된다. 마치 요술을 부리는 것처럼. 아무리 쉬운 곡이라도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면 듣는 이는 곧 어리둥절해진다.
이럴 때쯤 연주자는 청중에게 순식간에 익숙할 만한 구절을 들려주고는 반응을 살핀다. 그 순간을 눈치챈 청중이 '아하, 그 곡이구나.'하면 연주자의 입가에는 자그마한 미소가 번진다. 그리고 자신이 하던 연주를 계속하기 위해 악기에 더욱 몰입한다.
아무리 앨범으로 많이 접한 곡이라도 실제 공연장에서 듣게 되거나 다른 멤버로 구성된 백 세션과 함께하면 아주 새로운 느낌의 옷을 입는다. 그럴수록 청중은 깊은 호기심을 느끼며 앞으로 전개될 음악 방향에 관심을 갖게 되는 법. 밝은 초록색이 우리의 시선을 멈추게 했던 신선한 느낌의 앨범 [한충완]. 그 안에 담겨있는 음악들은 실제 어떤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 펼쳐질 지 은근한 기대를 품으며 서울 예술의 전당 콘서트 홀로 향했다. 2000년 여름의 마지막 비가 촉촉히 오는 가운데 8월의 24번째 날이 초록빛 연주인들과 함께 진한 초록색으로 변해갔다.
무대에 오른 5명의 연주인들(피아노:한충완, 기타:홍준홍, 베이스:노덕래, 색소폰:장효석, 드럼:이정훈)은 흑과 백으로 의상을 맞췄고, 긴 머리를 가지런히 묶고 그랜드 피아노와 신디사이저로 둘러 쌓인 속에 앉아있는 인자한 선생님의 모습으로 마치 악단을 지휘하듯 커다란 손짓을 하던 한충완은 흰 옷이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오늘만을 위해 아껴놓은 옷을 정성스레 다려 입고 정성들인 흔적이 엿보이는 듯.
무대 위로 박수를 받고 올라온 연주인들에게 잔뜩 기대를 하고 있는 청중들을 어느 정도 만족시키면서 또 연주자 자신도 일종의 워밍업으로 그날의 컨디션을 점쳐보는 첫번째 연주. 이미 예상했던 대로 'Off-Road'(3집 수록곡)가 흘러나왔고 경쾌한 즉흥 연주로 컨디션이 최고임을 슬쩍 보였으나, 언뜻 보기에도 생기 발랄한 20대 백 세션들은 넓은 공연장과 눈앞의 수많은 청중이 부담스러운 듯 긴장해 있었다.
하지만 많은 청중 앞에서 그들을 주눅들지 않고 연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한충완은 다른 세션 각자의 즉흥 연주 때 살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자신감 있는 눈빛을 보내는 여유도 보였다. 공연을 위해 새롭게 만든 곡과 3집에 수록된 '비온 뒤'까지 연주하고 나서야 관중을 향해 얘기를 하려고 마이크를 뽑아 들었다. 그러면서 그의 얼굴에는 관객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음악에 대한 확신의 표정이 배어났다.
차분하고 짧은 세 곡의 소개에 이어서 밴드는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솔로 색소폰 연주가 재지한 분위기를 한껏 연출하도록 자극하는 가운데 그의 연주에서 예측하지 못한 훌륭한 엇박이 튀어나오자 너무나 밝은 웃음을 지어 보이는 한충완. 단원들을 엄숙하고 인자하게 감싸주는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하는 건반 연주자로 이 무대에 오른 그를 최상의 기분으로 끌어올리는 청량제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반면 피아노의 소리가 집중적으로 부각되지 않음에 조금은 섭섭해 하는 청중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의 자작곡 6곡을 연주한 1부 무대 후에 재즈 친구들 중 첫번째로 피아니스트 노영심이 초청됐다. 분위기 있는 하얀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유려한 손놀림으로 영화 "씨네마 천국"에 삽입됐던 곡과 얼마 전 개봉한 영화 "미인"의 삽입곡을 연주했다. 곧이어 바통을 이어받은 친구는 맨발의 여성 보컬 이은미. 재즈 스탠다드 곡 'I've Got A Crush On You'와 'P.S. I Love You'를 걸쭉하게 불러서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켰다.
이미 이은미와 함께 연주하기 위해 무대 위에 올랐던 밴드는 2부의 분위기를 동심으로 이끌었다. 동요 '학교종'과 '종이 비행기'(3집 수록곡)를 연주해 청중의 마음을 정화시킨 그들이 다음 번에는 조금 어려운 난제를 제시, 두 번째 네 번째 박자에 힘이 실리는 느린 템포의 곡을 연주하면서 그동안 무대 위에서 익힌 기량을 유감없이 보였다.
그리고는 '야간비행'으로 그들의 풋풋한 연주를 마감했다. 마음껏 기교를 부려 흥을 내기 보다는 다소 조심스럽고 차분하게 목표를 향해 한발씩 나아가는 그들의 모습에 청중들은 박수를 보냈으며, 신나는 'Come With Me'(3집 수록곡)를 앵콜곡으로 받아냈다.
'서울 예술대학교'라는 공통 분모를 가진 연주인들, 최고의 실력을 가진 스승과 졸업생, 재학생이 뭉친 무대였다. 인자한 스승은 커가는 제자들에게 넓은 무대에서 연주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고 제자들은 주어진 공식대로 따랐다. 그러나 아직 연주 경험이 많지 않은 어린 세션들은 재즈의 깊이와 흥을 표현하는데 부족함이 많았다.
그 가운데에서도 건반을 연주하는 동안 내내 솔로 연주에 치중하기 보다는 밴드와의 조화와 선도에 앞장선 한충완. 스승의 입장에서 후학들과 함께 연주하며 자신을 그들에 맞춰주는 그를 보면서 밝은 웃음을 갖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연주하는 연주인이 음악을 포용하는 모습을 떠올려 본다.
김효정 coolyang@tubemusic.com
기사제공 : 튜브뮤직 www.tubemusi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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