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경택칼럼]민주당 총재는 어디 있나

  • 입력 2000년 8월 30일 18시 35분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최근 ‘강력한 정부’와 ‘강력한 여당’을 강조하고 있다. 집권 후반기에 접어든 요즘 정부 여당에 불리한 일들이 잇달아 터지면서 야당이나 언론의 비판이 거세지고 있지만 법과 원칙에 따라 할 일은 소신껏 밀고 나가야 한다는 뜻인 모양이다.

마침 어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도 정권 재창출을 다짐하면서 새 출발의 시동을 건데다 남북관계도 나름대로 궤도를 달리고 있기 때문에 정부 여당으로서는 자신을 갖고 ‘강하게’ 밀고 나갈 수 있다고 본다.

‘강한 힘’은 어디서 나오나. 북한의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은 자신의 힘이 나오는 곳은 군력(軍力)이라고 했지만 김대통령의 경우 힘의 원천은 국민이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김대통령에 대한 지지도는 여전히 높다. IMF 외환위기를 잘 극복했고 남북정상회담도 성사시켰으니 이것만으로도 지지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요즘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면 김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가 계속 높게 유지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최근 김대통령이 총재로 있는 민주당이 저지른 일들을 보면 누군가가 책임져야 할 것들인데 누구 하나 진솔하게 사과하거나 책임지는 사람 없이 그냥 뭉개고 넘어가려 한다.

대표적인 예가 지난달의 국회법 날치기사건이다. 서영훈(徐英勳)대표는 한때 사과할 듯했으나 야당의 반응이 신통치 않자 입을 닫고 있다. 잘못한 것을 깨달아 사과하려 했으면 야당의 반응에 관계없이 먼저 솔직한 사과부터 하는 게 순서다.

그래야 일이 풀린다. 그리고 그 사과는 야당을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국민을 향한 것이어야 한다. 야당도 야당이지만 날치기사건으로 국민이 받은 정치에 대한 허무감 실망감 같은 상처는 무엇으로 치유될 수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 또는 고발돼야 할 사람을 손을 써서 빼줬다거나, 검찰과 선관위에 개별적으로 부탁해서 처리했다는 민주당 사무부총장과 원내총무의 말은 한마디로 여당 실세라는 사람들이 검찰이나 선관위를 마치 자기 주머니 속의 공깃돌 갖고 놀듯이 한다는 얘기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곰곰이 씹어보면 집권 여당의 핵심 당직자가 손을 쓰면 법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말이 아닌가.

문제의 발언이 폭로되자 민주당은 ‘실언’이라고 밀어붙인다. 김대통령의 오랜 비서 출신으로 당조직 관리를 주도해 온 ‘조직통’이란 사람이 그렇게 예민한 문제에 대해 ‘실언’할 수 있는지, 정말 모를 일이다.

민주당 사람들은 진상 규명과 관련자 처벌, 사죄를 요구하는 야당에 ‘정치 공세 그만두라’고 받아친다. 그러나 집권 여당은 야당만 상대로 정치를 하는 게 아니다. 국민과 눈높이를 맞추고 호흡을 같이 해야 한다. “허허! 그 사람 말이 실언이래.” 겉으로는 이렇게 말하지만 속으로는 뭔가 속임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국민의 냉소적 분노, 자존심이 짓밟힐 대로 짓밟혔다고 생각하는 양식 있는 검찰과 선관위 구성원들의 쓰린 마음, 이런 것들을 읽어낼 줄 모르는 정당이라면 그 정당은 자격이 없다.

만약 입장을 바꿔 김대통령이 이 상황에서 야당의 총재라면 어떻게 ‘투쟁’했을까 궁금하다.

지금 민주당 총재는 엄연히 김대통령이다. 총재는 당의 최고책임자로서 당을 대표하고 당무를 통할한다. 사안의 중대성으로 보아 총재가 무언(無言)의 대로(大怒)만 하고 있을 게 아니라 뭔가 입을 열고 매듭을 풀어야 할 때라고 본다. 그러나 청와대 관계자는 지금은 대통령이 직접 나설 때가 아니라며 “대통령은 당(黨) 말고도 신경 써야 할 일이 너무 많다”고 한다.

그렇다면 김대통령은 이번 기회에 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국정에만 전념하는 게 어떨지 모르겠다. 사실 남북문제와 경제 문제만 해도 너무 큰 짐이 아닌가.

김대통령은 요즘 잇달아 터지는 비리의 뿌리를 직시, 당과 정부를 막론하고 주변에서 문제를 일으키거나 부정에 관련된 사람은 과거의 인연에 연연해하지 말고 과감하게 떨쳐 버려야 한다.

김대통령은 이 시점에서 정리할 것은 정리하고 집권2기를 새롭게 출발할 수 있어야 한다.

어경택<논설실장>euh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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