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충식/클린턴 '고향 無情'

  • 입력 2000년 8월 31일 18시 47분


고향 사람이라면 죽고 못사는 한국 국민 여러분. 저 클린턴이 답답하고 억울한 일로 몇자 올립니다. 저는 8년간의 미국대통령 직을 곧 물러납니다. 골치 아팠던 북한 핵문제나 르윈스키 스캔들 같은 난관을 이겨내고 이제 성공한 대통령으로 박수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고단한 백악관 생활이 이제 다 보람으로 느껴지는 시간입니다. ‘지퍼게이트’로 속이 상했던 힐러리의 기분도 많이 회복되고 남편 체면도 서가는 편입니다.

▷저의 고향은 아칸소입니다. 미국서도 여기 출신은 촌뜨기 취급을 받습니다. 제가 주지사를 하면서 빈궁한 재정을 확 바꿔놓았지요. 별 인재를 내지 못한 아칸소로 치면 저야말로 영웅입니다. 재(在)워싱턴 아칸소향우회가 있다면 당연히 메달과 상패 감사패로 저를 맞아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퇴직 후의 유일한 생계수단인 변호사 자격증을 아칸소대법원에 의해 빼앗길 처지에 있습니다. 타관(他關)에서 박수 받고 고향에서 박해받은 예수의 슬픈 심정마저 생각하게 됩니다.

▷르윈스키와의 일 때문이라면 또 모릅니다. 이건 폴라 존스라는 멋없고 징그러운 여자와의 일을 빌미삼습니다. ‘부적절한 관계’의 밀도도 르윈스키건에 비추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저는 미국대통령으로서의 국가체면 유지와 방어본능으로 조금 둘러댄 것일 뿐입니다. 그것도 나중에 바로잡았으니 진술 번복에 불과하지요. 한국 국민은 정치인이 한없이 번복하고 둘러대도 너그럽지 않습니까? 내 고향 아칸소의 딱한 용렬함이란….

▷판결인즉 ‘위증은 변호사 윤리에 어긋나는 부정행위다’라는 것입니다. 한국에는 나 같은 단순한 말실수가 아니라, 본격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변호사도 통하지 않습니까. 뇌물전달 탈세 같은 변호사 범죄가 서울의 변호사 모임에서도 토론거리라지요. 아무리 한들 미국에서, 그것도 고향에서 대통령인 저에게 이럴 수 있을까요. 저는 명문 예일대법대를 나와서 대통령까지 다했습니다. 화난 김에 말하건대, 너그러운 한국민이 받아만 주신다면 경험과 지식을 살려 서울에서 봉사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지금 대권주자후보들이 다들 명문대 법대출신에 변호사 자격을 갖고 있다니.

<김충식논설위원>seesch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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