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사유 궁전은 이 정도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궁전 광장을 가로 질러 건물의 뒤쪽에서 만난 100만평 규모의 정원과 운하는 권력이 마음만 먹으면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인공적으로 조성한 공원에 이럴 수 있나 싶도록 시원한 전망을 선사했다. ‘짐은 곧 국가다’ 라며 절대권력을 휘둘렀던 루이 14세는 늪지대였던 이곳에 한꺼번에 2만명이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궁전을 세웠다.
엄청난 양의 흙으로 늪을 메우고 그 위에 나무를 심는 기초공사에만 20년이 걸렸다. 그리곤 1400개의 분수를 세웠다. 이를 위해 센 강의 물줄기를 바꾸고 펌프로 물을 끌어들였다. 그는 자연의 형상을 바꾼 셈이었다. 그의 자연변형 노력은 정원의 수목에까지 미쳤다. 사각형 방사형 원을 중심 도형으로 한 정원의 구도는 물론 자연스레 자라는 나무를 가위질하여 억지로 우산이나 원통 등 자신이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었다. 권력은 천부의 자연까지도 바꿀 수 있음을 만인에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나는 자연의 지세를 최대한 살려 정문(돈화문)을 내고 기능에 맞게 전각들을 배치한 우리의 창덕궁을 떠올렸다. 건물 구조와 상징물(예를 들면 어수문 문설주의 용조각, 주합루 소맷돌의 구름조각, 부용지 모서리의 잉어조각 등) 등은 오래 두고 보면서 생각을 거듭해야 겨우 그 뜻을 헤아릴 수 있는데다 가위질은 고사하고 가지 하나 억지로 휘어진 게 없는 수목들이 자라고 있어 베르사유궁전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물론 그런 차이는 자연관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지만 그것만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조선왕조나 프랑스의 부르봉왕조는 모두 왕을 권력의 정점으로 한 왕권국가였고 또 위축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궁전을 지었지만 구체적 방법에선 서로 달랐던 것이다.
루이 14세는 봉건영주 등의 귀족계급에 분산돼 있던 권력을 왕에게 집중시키고자 파리에서 20km나 떨어진 베르사유 한촌(寒村)에다 거대한 궁전을 짓고는 매일 파티와 무도회를 열어 귀족들의 출근상황을 점검했다. 눈 도장을 찍지 않은 자에게는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했으니 귀족들은 열심히 출근해 자기 재산을 파티와 무도회에 쏟아 부어야만 했다. 귀족들의 경제력은 날이 갈수록 위축된 반면 왕의 그것은 끝없이 늘어났다. 절대왕권은 그렇게 확립됐다.
프랑스에선 왕권의 지나친 강화가 시민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킬 즈음 창덕궁의 주인이 된 정조는 후원의 입구에다 부용지(芙蓉池)를 파고 주위에다 규장각을 들인 주합루와 부용정 등을 세워 사색과 학문의 공간으로 삼았다. 역시 오랜 당쟁으로 위축된 왕권을 되살리고자 했던 것인데 기성관료들의 주머니를 가볍게 만들어 무력화시키는 방법이 아니라 학문을 연마한 신진관료들을 널리 등용하여 자연스레 세대교체를 이루고자 했다. 창덕궁은 파티와 무도회가 아니라 책 읽는 소리와 전적들로 가득 차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베르사유궁전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베르사유와 창덕궁의 차이점은 이것만은 아니다. 아주 흥미로운 사실도 있다. 그것은 공간구성의 차이에 기인하는데 베르사유는 두개의 작은 부속건물을 제외하곤 모든 방들이 한 건물안에 들어와 있는데 비해 창덕궁은 처음부터 인정전 희정당 대조전 경훈각 등 독립된 건물을 짓고 나름의 기능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의 밥상에 오르는 밥 국 찌개와 반찬이 별도의 그릇에 담기듯 공간구성도 그렇게 했던 것이다. 음식을 별도의 그릇에 담아 상에 올리는 것을 ‘분산식’이라 한다면 커다란 접시 하나에 여러 음식을 담는 서양식은 ‘통합식’이라 부를 수 있다.
우리의 분산식은 창덕궁뿐만 아니라 경복궁 창경궁 등 궁전과 대웅전 명부전 무설전 요사채 등으로 구성되는 절집, 안채 사랑채 행랑채 등으로 구분된 살림집에도 적용됐다. 반면 서양의 건축물은 모두 통합식이다. 빈의 쉔브룬궁전이나 스톡홀름의 드로트닝홀름궁전 등 많고 많은 성당과 교회당도 예외없고 세대 내의 방 뿐 아니라 여러 세대가 한 건물 안에 들어가 있는 일반가옥 또한 어김없이 통합식을 따르고 있다.
동서양의 건축이 왜 이렇게 서로 다른 공간구성을 갖게 되었을까. 우선 ‘목조짜기식’인 우리의 건축방식과 ‘석조쌓기식’의 서양식 건축방식의 차이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목조짜기식에선 구조역학 관계로 큰 건물을 세울 수 없었던 데 반해 석조쌓기식에선 건물의 크기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곳에는 그곳에 맞는’ 기능을 가진 건물을 배치한다는 ‘장소의 혼’(예를 들면 풍수나 공간의 서열화) 같은 것을 고려하면서 전체 속에서 개체의 의미를 따져온 데 비해 서양에선 실용성, 경제성을 우선했다. 우리의 생활공간도 따지고 보면 이런 공간디자인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권삼윤(문명비평가)tumi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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