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보기자의 반집&한집]뼈아픈 53…굳어버린 '돌부처'

  • 입력 2000년 9월 5일 18시 36분


한국측에서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장면이었다. 1일 오후 3시5분. 이창호 9단이 맞은 편에 앉은 저우허양(周鶴洋) 8단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9단이 돌을 던진 것이다. 오전 대국중 이9단과 저우8단이 서로 장고를 주고 받던 때만 하더라도 ‘끈질긴’ 두 기사의 바둑이 오후6시나 돼야 결판 나겠다고 생각했지만 싱겁게 끝나버렸다.

삼성화재배 16강 추첨에서 이9단의 상대로 저우8단이 뽑혔을 때 이9단은 아무 말이 없었다. 세계대회가 있을 때마다 이9단의 매니저격으로 따라다니는 동생 이영호씨는 “형이 대국전까지 저우8단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9단은 오직 속으로 다짐했을 것이다. ‘삼세번은 없다’고.

저우8단은 일본 요다 노리모토, 루이나이웨이 9단과 함께 이9단이 역대전적에서 밀리는 기사 가운데 한명. 96, 99년 후지쯔(富士通)배에서 만나 두번 모두 졌다. 서봉수 9단은 저우8단에 대해 “피말리는 1분 초읽기 속에서도 침착성을 잃지 않는 몇 안되는 기사”라고 칭찬한다.

무언의 복기가 시작됐다.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서로 묵묵히 한수씩 놓아간다.

한 10여수 진행되면서 이9단이 한수를 가리키며 입술을 달싹 댄다. 입은 움직이는데 소리는 나지 않는다. 그러면 저우8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금까지 놓던 수를 허물고 다른 수를 놔본다.

어느 쪽이 유리하고 무엇이 나빴다는 소린지 도저히 알 수 없다. 다만 그들이 나누는 바둑판 위의 수담(手談) 속에서 온갖 아쉬움과 후회와 질책이 엇갈렸을 것이다.

20여분정도 됐을까. 뒤쪽에서 바둑을 두던 조훈현 9단이 슬쩍 다가왔다.

“아무래도 좌상귀를 그냥 잡아두는 게 편했을 걸.”(조9단)

“그쪽에서 워낙 당해서….”(이9단)

저우8단은 말없이 바둑판만 바라 본다.

조9단이 끼어드는 바람에 한없이 이어질 것 같던 무언의 복기가 끝났다.

그들의 대화에서 완전히 소외됐던 기자가 바둑돌을 통에 쓸어담고 일어서려는 이9단을 붙잡고 물어봤다.

“(기보를 보여주며) 어떤 수가 잘못된 거지?”

“(흑 53의 수를 가리키며) 이거요.”

<장면도>
흑 1(흑 53의 수)이 처음보는 수. 그러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조훈현 9단이 말한 것처럼 정석대로 5에 젖혀 잡아두는 것이 좋았다. 백 8이 묘수. 컴퓨터 같은 이창호 9단이지만 이 수를 깜빡했다. 그냥 잡을 수 있었던 돌이 패가 돼서 흑이 초반부터 불리해졌다.▶

그리고는 훌쩍 일어서 다른 판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더이상 물어볼 수 없었다. 문용직 4단은 “이창호 9단의 장점은 꾸준히 자기 모습을 변모해가는 데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9단의 뒷모습에는 그가 많은 패배 끝에 조훈현과 요다를 넘었듯 또 한번 ‘저우허양’이라는 걸림돌을 넘을 것이라는 각오를 되새기고 있는 듯 했다.

그 시각 검토실에서는 저우8단을 중심으로 중국기사와 관계자 예닐곱명이 모여 호탕하게 웃어가며 이9단과 저우8단의 바둑을 검토하고 있었다.

<서정보기자>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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