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만난 그의 얼굴은 약간 지쳐보였다. 당정협의 국무회의 시민단체관계자회의 청와대 규제개혁위원회의 등 쉴틈없는 그날 일정을 듣고보니 이해가 간다. 과천집무실에는 가지도 못했다고 했다. 며칠후엔 체코 프라하에서 열리는 국제통화기금(IMF)총회에도 가야 한다.
진장관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엘리트 정통 경제관료다. 과거 1,2차 오일쇼크를 경험하고 동력자원부 노동부 기획예산처 등 경제부처 장관을 고루 거쳤다. 기아자동차 회장으로기업 경영경력도 있다. 그의 경륜을 따라올 사람은 없는 듯하다.
그러나 한편으론 걱정이 앞섰다. 너무 바빠서 과연 언제 경제를 챙길까. 증시폭락 유가급등 대우자동차매각차질 금융부실 자금시장불안 등 화급한 현안이 그야말로 산처럼 쌓여있다는데. 물론 그의 곁에는 똑소리 나는 경제관료들이 진을 치고 있지만. 3년전 외환위기가 닥칠 때도 엘리트 관료들이 있지 않았는가.
다행히도 그의 답변은 막힘이 없었다. 고유가 대책에서 증시대책 공적자금조성 대우차처리에 이르기까지 그의 말대로 실현된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타이밍이 맞아야 한다. 좋은 약이라고 아무때나 먹는 것은 아니니까. 더군다나 지금은 위기국면이니 응급처치가 필요한 법이다.
진장관은 취임하자마자 예금자보호한도를 조정하겠다고 말했다. 내년부터 은행이 망하면 2000만원까지만 예금을 돌려주게 돼있는 한도를 바꾼다는 얘기였다. 불과 3개월 남짓 남았다. 예금자나 금융기관이나 불안하지만 정부는 묵묵부답이다.
이 뿐인가. 자금시장이 마비된지도 한참이다. 공적자금을 조성해 부실금융기관에 투입하는 일도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이젠 발표는 그만하고 실행하는 게 중요하다. 국민을 위한다면 타이밍을 놓쳐서는 안된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관료들의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관료들은 스스로 개혁하지 못하는 속성이 있다. 김대중 정부의 대표적인 실패사례 중 하나인 공공부문개혁 부진은 바로 관료개혁을 관료에게 맡긴데 원인이 있다. “관료란 절대로 스스로 개혁할 수 없기 때문에 외압에 의해 개조될 때까지 자기 증식만을 꾀하는 존재”(오마에 겐이치)이기 때문이다.
관료들이 스스로 바뀌지 않을 땐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한다. 지금은 사실상 위기상황이다. 우선 나라안이 3년전 수준으로 후퇴하고 있다. 의약분업 노동시장개혁 공공부분개혁 기업구조조정 등 대통령이 팔을 걷어붙이지 않는 한 해결이 쉽지 않은 과제가 많다. 게다가 시간도 별로 없다. 앞으로 일을 할 수 있는 기간은 1년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해외사정도 좋지 않다. 중동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유가가 천정부지로 뛰고 있는데다 이웃 대만은 금융부실로 불안한 상황이다. 3년전에 경험했듯이 경제불안은 들불처럼 순식간에 번져간다.
더 이상 상황이 악화되기 전에 김대중 대통령은 경제를 회생시킬 실천 프로그램을 직접 점검해야할 시점이다.
박영균<금융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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