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속으로]이상운의 '탱고'

  • 입력 2000년 9월 22일 18시 33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소잉카는 요즘 문단과 학계의 첨예한 관심사인 ‘정전(正典)의 유효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진정한 정전 담론은 사실 성스러운 문학텍스트나 신성화된 대가들과 관련이 있다기보다는, 권위주의적 기존 세력과 이를 새롭게 바꾸려는 창조적 의지 사이의 부단한 투쟁과 관련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정전으로 인정받은 작품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규범적 권위주의와 검열이 만들어놓은 정전목록이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이상운의 최신작 ‘탱고’(하늘연못)는 정전의 권위에 도전하는 창조적 의지가 충만한 작품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경직된 전통적 서사양식 대신 유연하고 참신한 여성적 글쓰기와, 크리스테바가 말하는 여성성의 ‘반역적 열림’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이상운은 여성작가 특유의 일상성 속에 안주하지는 않는다. 그는 ‘극히 통속적인 일상의 풍경들 속에’ 존재론적 고뇌를 슬쩍 끼워 넣는다. 그의 존재론적 고뇌는 물론 이 나라 젊은이들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들을 빼앗아간 70, 80년대 한국의 어두운 정치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우연한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은 주인공을 통해 작가는 개인을 파멸시키는 비극적 역사의 우연성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나 ‘탱고’에서 정치와 역사의 무거움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문학에서 정치와 역사는 뼈와 같은 것이어서, 밖으로 돌출 되지 않을수록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탱고’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우연’이다. 우연한 사고로 고아가 된 주인공 현서 앞에 우연히 옛 여자친구 혜리가 나타나고, 이후 모든 것은 우연의 연속으로 이어진다. 우연은 필연과 질서, 그리고 확신과 이성적 논리를 해체한다. 현서는 한 때 ‘학습지의 질서를 위해’ 교정자로 일했던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며, ‘있음의 없음’과 ‘없음의 있음’의 초월적 깨달음을 통해 데리다의 해체론과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실성 이론을 포용한다.

우연을 포용하는 사람에게 세상과 현실은 파편적일 뿐이다. 그래서 ‘탱고’의 문단들은 모두 앞뒤로 단절되어 있다. 모더니즘적인 질서나 총체성이 부재한 ‘탱고’가 현실을 파편적으로 본 도널드 바셀미의 ‘죽은 아버지의 우시는 모습’이나, 삶과 현실의 예측불가능성을 통찰한 보르헤스의 ‘죽음과 나침반’을 연상시켜주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이다.

그 동안 수학공식처럼 논리가 명확한 탐정소설을 써온 현서는 이제 비로소 현실은 이성적 추리로는 풀 수 없는 우연으로 가득 차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처녀작 ‘픽션클럽’에서 처럼 ‘탱고’가 새로운 글쓰기에 대한 작가의 성찰과 탐색으로 확대되는 것은 바로 그 순간이다. 작가가 ‘탱고’에서 “일상과 불교와 탐정소설과 메타픽션을 뒤섞어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일 것이다.

7년만에 불쑥 나타나 왜 말없이 떠났느냐고 추궁하는 혜리는 작가가 잊으려했으나 기억 속에는 여전히 남아있는 역사의 아픈 상처이자, 동시에 작가가 결코 소유할 수 없는 예술의 혼처럼 보인다. 자신들의 만남도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현서는 혜리의 아픔에 대해서도 묻지 않음으로써 결국 그녀를 놓치고 만다. 그렇다면 작가는 우연과 단절을 포용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패러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탱고는 빠름과 느림, 그리고 상대와의 만남과 단절을 반복하며, 직선과 곡선을 모두 활용하는 춤이다. 스텝이 때로 능숙하지 않더라도, 언어와 사유의 탱고를 추는 작가 이상운에게 무거움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의 니체적 가벼움 속에는 보이지 않는 정치와 역사가 이미 무겁게 드리워져있기 때문이다.

김성곤(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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