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올림픽 효자종목인 유도가 시드니올림픽에서 단 한 개의 금메달도 따내지 못하는 참담한 성적표를 안았다.
한국이 올림픽 유도에서 첫 금메달을 따낸 것은 84로스앤젤레스올림픽. 당시 안병근이 물꼬를 튼 뒤 하형주가 가세하며 2개의 금메달을 챙겼고 88서울올림픽 2개(김재엽 이경근), 92바르셀로나올림픽 1개(김미정), 96애틀랜타올림픽 2개(전기영 조민선) 등 유도종주국을 자처하는 일본의 아성을 위협했다.
그러나 한국은 더 이상 유도 강국임을 자처하기 힘들게 됐다. 왜 이렇게 추락했을까.
한마디로 대한유도회의 아집과 독선이 자초한 결과라는 것이 중론. 한국유도의 침체는 오래 전부터 예견됐다. 96애틀랜타 멤버들이 출전한 97세계선수권에서 한국은 전기영 조인철 김혁이 3개의 금메달을 따내며 기세가 등등했다. 하지만 한국유도의 간판 전기영 등이 은퇴한 이후 한국 유도는 세대교체 실패로 침체의 길을 걷었다.
이런 속에서 유망선수 발굴은 물론 해외 정보 수집에도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번 대회에서 금메달을 자신하던 장성호가 무명의 알제리 선수에, 조민선이 쿠바 선수에 진 것도 신흥 강국으로 부상 중인 아프리카와 남미에 대한 사전 정보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신예 발굴을 소홀히 한 끝에 이미 은퇴했던 조민선과 정성숙을 다시 불러들이는 고육책도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이에 반해 애틀랜타올림픽 당시 3개의 금메달을 차지했지만 프랑스(3개)와 한국의 추격세에 밀려 4개 종목에서 금메달을 놓쳤던 일본이 시드니올림픽을 준비한 과정은 본받을 바가 많다.
특히 일본은 애틀랜타올림픽 이후 유럽에서 개최된 국제대회에 모두 출전해 유럽선수들에 대한 적응력을 키웠다. 시드니올림픽 직전인 7월에는 사상 처음으로 유럽전지훈련도 가졌다. 대표선발전 방식도 과감히 바꿔 3차례의 국내선발전을 거치며 선발된 1, 2진을 끊임없이 해외대회에 출전시켜 다양한 변칙기술에 적응하도록 배려했다.
<김상호기자>hyangs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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