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새로운 역사적 상황’이 나타난 것은 겨우 50여 년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은 ‘산업으로서의 문화’의 등장을 의미한다. 문화와 산업이 결합하면서 경제의 세계화에 이어 문화의 세계화도 시작됐다.
이미 1960년대에 많은 사회학자들은 경제의 세계화 속에서 문명들이 융합될 것을 자신 있게 전망했었다.
그러나 30여 년이 지난 지금, 문화산업의 세계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또 한편에서는 여전히 사회적 문화적 분열, 대소 집단들의 자기 규합, 다양한 생활양식과 소비양식의 생산 등이 진행되고 있다.
프랑스 파리 5대학의 민족학 및 인류학 교수인 저자는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차이, 분열, 자기 것, 패거리, 말씨, 사는 곳, 계급, 출신지, 정파, 지역, 이념, 종교에 따른 구별을 만들어내는 기계”라고 주장한다. 이런 분열은 바로 각 집단에서 전통으로 전승된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고, 이를 통해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나침반의 역할을 하는 기존의 문화가 영속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문화의 세계화’라는 것이 ‘문화’의 개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한다. “문화산업과 문화를 혼동하는 것은 부분을 전체로 착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류의 10분의 9’는 영화 방송 음반 잡지 등의 문화상품 외에 다른 기준에 따라 평생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바르니에교수는 문화산업의 세계화 속에서도 다양한 문화가 끊임없이 형성되는 것이 ‘차이’를 만들어 내는 인간의 성향이라고 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극단적인 문화 다원주의나 가치론적 회의주의에 빠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문제는 결국 “세계 각지에서 방향지시의 주체들이 스스로 변모하고 문화적 분열을 극복할 수 있을 만큼 강한가 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문화적 자존심이 강한 프랑스인으로서 미국 중심의 문화 세계화에 강력한 반론을 제기하던 바르니에교수는 “반드시 최악의 상황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며 “제2의 WTO와 같은 문화의 국제기구에 의해 힘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금은 궁색한 결론을 내린다.
물론 “이윤을 목표로 하는 미디어나 문화산업이 인류 전체에게 필요한 공동의 나침반과 기준을 제공하는, 진정한 문화의 세계화가 오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그의 주장은 타당하다. 하지만 그 스스로 진정 원했던 방안, 즉 문화산업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상대적으로 광범위하고 잘 조직돼 있으며 정체성을 주고 방향을 제시해 줄 문화를 건설”할 길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
▼'문화의 세계화'/ 장 피에르 바르니에 지음/ 주형일 옮김/ 한울/ 188쪽, 9000원▼
<김형찬기자>khc@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