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보의 옛날신문 읽기]달리기 우승해서 조국통일 앞당기자

  • 입력 2000년 9월 23일 16시 09분


▲1999년 보스턴 마라톤대회
▲1999년 보스턴 마라톤대회
요즘 시드니 올림픽 게임을 관전하시는 재미가 쏠쏠하지요? 평소 스포츠 게임에 별 관심이 없는 저같은 사람도 올림픽 중계만큼은 찾아서 보곤 합니다. 하기사 TV만 틀면 올림픽 게임 얘긴데 관심 안가질 도리가 있겠어요.

올림픽 시즌이니 오늘은 경향신문 1950년 4월21일자에 실린 ‘마라톤 한국에 빛나는 월계관' 제하의 스포츠 기사 한편을 감상해 봅시다. 보스톤 마라톤 대회 결과를 리포팅하고 있는 기사로군요.

장하다.

대한의 아들!

우리는 이겼다.

이겼다.

승리의 월계관이 우리에게 돌아왔다.

영광의 태극기가 「보스톤」 하늘높이 힘차게 휘날렸다....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보스톤 마라톤」대회에서 우리 한국에 세 선수가 통쾌하게도 첫째 둘째 그리고 셋째 자리를 모조리 차지하여 세계를 제패한 것이다.

「올림픽」대회에 다음가는 국제적 「마라톤」대회인 「보스톤」마라톤대회는 세계 14개국 135명의 선수가 참가한 가운데 미국 「보스톤」시에서 19일 정오(한국시간 20일 새벽3시)부터 역사적인 막을 올리였다.

◇게임을 조국통일의 힘으로 지향

‘창파만리 조국의 영예'라는 중간제목에 다음의 기사문이 이어집니다.

1일 전국민의 환호리에 용약장도에 오른 함기용(21.양정중학) 송길윤(20.숭문중학) 최윤칠(23.연희대학)의 3선수는 명코치 손기정씨의 치밀한 작전과 지도 아래 백삼십여(`미터' `마일'같은 단위가 빠진 듯) 날쌔게 스타트하여 소정 코스 26마일 14분지1(42.195키로 195미터=1백7리)를 역전 끝에 당당히 주파 2시간32분39초라는 기록으로 함기용군이 제1착을 하고....(중략)

이제 우리는 「베르린 올림픽」대회 때의 영예와 1947년 「보스톤 마라톤」대회의 광영을 다시 회복하였다.

아니 어느「마라톤」대회의 역사를 들춰 보더라도 이러한 빛나는 전승기록을 찾아낼수 있을 것이냐.

「마라톤 한국」의 전도는 실로 양양한 바 있다.

이제 우리는 이들 패자를 더욱 더 알뜰히 가꾸어 1952년의 차기 「올림픽」에도 다시금 찬란한 월계관을 차지하도록 온겨레의 힘과 마음을 기우리도록 하자!

그리고 이 우렁찬 개가를 고스란히 조국통일의 힘으로 지향시켜 빛나는 강토를 세계에 자랑하자!(하략)

◇과잉 국가주의

‘장하다. 대한의 아들! 우리는 이겼다. 이겼다.'

첫 부분부터 숨이 가쁩니다. 어찌 감격이라는 한마디 말로 그 환희와 흥분, 기쁨을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대한의 아들!' ‘영광의 태극기' ‘조국의 영예' ‘전국민의 환호' `창파만리' 등의 표현에는 가슴이 뜨거워 옵니다.

기사는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이 우렁찬 개가를 고스란히 조국통일의 힘으로 지향시켜 빛나는 강토를 세계에 자랑하자!'고.

독자 여러분들의 독후감은 어떠신지요? 다른 건 다 이해해도 달리기와 조국통일을 연결한 것은 좀 `오버'했다는 느낌이 드는데 어떻습니까. 저는 양자의 그 이음새가 어색하기 짝이 없군요.

다시 말하건대, 저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1950년이라는 연대였으니까. 아무것도 내세울게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너나 없이 초근목피하던 절대빈곤의 시절이었으니까. 그러니 우리의 건각이 얼마가 가슴 뿌듯하고 자랑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요즘의 스포츠 기사도 예나 지금이나 대동소이하다는 생각은 안드나요? 오늘날의 스포츠 기사에도 ‘애국심'과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는 과잉돼 넘쳐 흐릅니다.

외국 팀과의 게임에서 진 한국선수들은 망국의 주범이라도 된듯 죄스러워 하지요. 스포츠 기자들은 그들을 향해 `정신력이 해이해졌다'는 식의 비난기사를 씁니다. 사진기자들은 으레 죄인이 되어 김포공항을 들어오는 그들의 고개숙인 얼굴도 찍습니다. 독자들은 공분합니다. 뭐, 무슨 얘긴지 다 아실테니 예는 그만 들기로 하지요.

◇와러게임!

경기불황이니 뭐니 해도 어쨌거나 풍요의 시대입니다. 우리가 떠들지 않아도 지구촌은 이미 세계화의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DJ독재니 어쩌니 해도 이 땅에 민주주의가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오늘날에도 우리는 부지불식 재밌는 스포츠 게임조차 국가주의라는 눈으로 관전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게임은 게임으로 즐기는 건 어떻습니까. 세계시민답게. 게임은 결국 즐거운 놀이, 재밌는 오락, 그러니까 유희에 불과하니까요.

‘What a game!'

중학생은 이 영어 감탄문을 ‘게임이군!'으로 번역하겠지요. 그러나 고등학생쯤 되면 ‘이것 참 재밌군!'이라고 옮길 겁니다. 올림픽? 와러게임!

늘보<문화평론가>letitbi@hanmail.net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