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팀의 한 각료는 그게 다 언론이 지나치게 경제위기를 강조한 결과라고 항변한다. 아닌게 아니라 과거자료를 들춰보면 98년 중반, 겨우 국가부도를 넘긴 순간부터 이번까지 우리 언론은 무려 여덟차례나 제2의 외환위기를 경고하는 기사를 다뤘다. 그런데도 아직 나라가 결딴나지 않았으니 정부가 언론에 불평할 수도 있겠지만 과연 지금이 그렇게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인지는 또다시 의문이다.
▼4대부문 개혁 성적표 초라▼
경제팀 수장인 진념 재정경제부 장관은 “거시지표는 낙관적이나 이를 뒷받침하는 금융 기업 건설 지역경제의 구조가 취약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고 말해 경제가 좋다는 건지 나쁘다는 건지 더 알쏭달쏭하게 만든다. 낙관적이라는 국내총생산(GDP)이나 산업생산 출하 같은 거시지표는 통계를 내는 시간을 고려할 때 아무리 빨라야 한달 이전의 경제에 대한 실적치이다. 따라서 그의 말은 위안받고 싶은 마음에 시험 잘 치렀던 지난 학기 성적표에 매달리는 학생같은 느낌을 준다.
통계청은 동행지수 순환변동치가 100을 넘었다며 호황이라는 주장인데 이 지수는 환란의 회오리에 있던 97년 12월에 최고치를 기록할 정도로 ‘주책없는’ 수치다. 반면 선행지표중 하나인 한국은행의 기업경기조사 전망치는 이미 1년반만에 최저치로 떨어져 어두운 미래를 예고하기 시작했다.
경제를 반영하는 것이 주가인데 작년 말 1000고지를 넘나들던 종합지수가 거의 반토막으로, 그리고 코스닥의 벤처기업지수가 반의 반으로 잘라진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주가가 떨어지면 기업의 투자와 개인의 소비가 3개월이내에 급랭한다는 것은 우리경제 10년통계에 나와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능력부족과 경험미숙으로 ‘(포드에) 농락당한’ 대우차문제는 은행에 막대한 추가부실을 예고하는 화급한 경제현안으로 떠올랐고 기업들은 구조조정을 앞둔 은행들의 몸사리기에 돈줄이 막혀 질식상태에 빠졌으며 지방경제는 지역을 불문하고 IMF직전의 수준으로 돌아간 것으로 통계에 나와 있다. 요즘 이른바 장바구니 물가가 어떤 꼴인지는 꼭 주부들에게 묻지 않더라도 정부가 더 잘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경제전반이 모두 이 모양이면 위기인가 아닌가.
그러다 보니 벌써 여론의 한쪽에서는 이 정부가 집권이후 최대의 치적이라고 자랑해 온 외환위기 극복의 성과에 대해 다른 평가를 내기 시작했다. 정부가 환란극복의 준거라고 내세우는 것은 불어난 외환보유고 하나뿐인데 이게 과연 정부의 공(功)이냐 하는 주장이 그것이다. 환란초기 달러가 귀해져 환율이 치솟으니까 당연히 수출경쟁력이 생겨 매년 수백억달러의 흑자를 내게 됐고 그래서 당연스레 외환보유액이 늘어났을 뿐이라는 주장은 위기극복 과정에서 아예 정부의 역할자체를 부정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실 최우선 국정과제로 내세웠던 기업 금융 노동 공공 등 4대부문 개혁의 평가표를 보면 정부로서도 할말이 없을 법하다. 특히 정부 영향력 아래에 있는 공공부문의 구조조정 성적이 얼마나 한심한지는 최근 감사원이 감사결과로 말해줬다.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데도 개혁의 만세를 먼저 부른 쪽은 총선을 앞뒀던 정치권이었다. IMF터널에 들어섰을 때 고통스럽더라도 저쪽 끝까지 갔어야 했는데 그만 중간에서 U턴해 되돌아 나오고는 다 이룬 양 손을 터는 바람에 국민은 IMF초심을 잊게 됐고 정부는 개혁의 기회를 놓쳤다. 우물쭈물하는 사이 시절은 바야흐로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기 시작한 집권후반기에 들어섰다.
▼"고통분담" 국민이 또 따를지▼
97년의 환란이 인도네시아발(發) 외환위기(外換危機)였다면 지금은 개혁실패의 부작용으로 내환위기(內患危機)를 자초한 상황이다. 김대중대통령은 27일 개혁부진을 시인하고‘국민전체가 금모으기하던 국난극복 정신’을 다시 갖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이미 정부를 따라 허리띠를 푼 국민이 그 고통을 향해 얼마나 흔쾌히 달려들지는 의문이다. 민심은 그냥 등을 돌리는 법이 없다.
이규민(논설위원)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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