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는 살아있다]'빨간머리 앤'

  • 입력 2000년 9월 29일 18시 44분


저는 빨간 머리 앤이에요. 세상에서 가장 상상력 풍부하고 잘 떠드는 여자 아이랍니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떠오르는 대로 지껄인다는 뜻은 아니에요. 힘겨운 삶과 메마른 주위를 아름답고 풍요롭고 의미있는 것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다는 말이죠. 생각해 보세요. 태어난 지 석 달만에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친척집 애보기로 전전하다 고아원으로 보내진 못생긴 빨간 머리 여자 아이에게 그것말고 무슨 힘이 있겠어요? 그러니까 제 공상과 수다는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인 전략인 셈입니다.

그건 아주 성공적인 전략이었어요. 덕분에 남자 아이가 아니라는 데 당황해 돌려보낼 생각을 했던 마릴라 아줌마와 매슈 아저씨의 마음을 사로잡고, 애이번리 사람들의 사랑을 담뿍 받으며 그 마을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으니까요.

‘전략’이라는 말이 좀 과했나요? 아니죠. 저 같은 고아뿐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인생은 여러가지 일이 일어나는 길고 힘겨운 여정인데, 그 길을 제대로 갈 수 있는 궁리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돼 있어야 하니까요.

제 전략, 그러니까 공상과 수다가 100년 가까이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게 모든 현상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 또 솔직함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저는 고아인 저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자기 외에는 아무 것에도 관심도 애정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산사나무 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고 보고 싶어하지도 않는 사람, 항상 바스락거리며 뭐라고 속삭이는 단풍나무는 정말 다정한 나무라는 말에 코웃음을 치는 그런 사람들 말예요.

목사님 설교가 아무리 재미 없어도 꾹 참고 감동적이라는 얼굴로 들어야 하는 어른들도 저는 참 안됐어요. 하지만 우리 마릴라 아줌마처럼, ‘말로 표현되지 못한 그 은밀한 비판적인 생각이 철없는 아이의 솔직한 한마디로 느닷없이 공공연하게 고발당하는 느낌’을 받으며 유쾌해할 수 있다면, 그건 괜찮은 어른인 것 같아요. 사실, 그런 솔직한 한마디는 어린 아이가 해야 제격이잖아요? 말하자면 동화는, 애들 핑계대고 솔직한 소리를 속시원하게 해버리고 싶은 어른들이 쓰는 거 아닐까요?

제 이야기의 무대가 되는 캐나다의 프린스에드워드 섬은 일년내내 관광객이 들끓는답니다. 몽고메리 아줌마가 그토록 아름답게 묘사한 자연을 보고 싶어하는 거지요. 하지만 저처럼 솔직함과 호기심, 무엇보다도 애정을 가지고 보지 않으면 절대로 빨간 머리 앤의 애이번리 마을은 나타나지 않을 거예요. 애이번리 마을을 찾는 데 성공하시기를 바래요!

김서정(동화작가·공주영상정보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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