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첩대장 윤필용(尹必鏞)준장은 당시 서울 외곽을 지키는 6관구사령관 김재규(金載圭)소장에게 이 속도에 맞추어 매복선을 쳐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6관구 참모들은 제아무리 특수부대라 해도 그럴 수는 없다면서 시속 10㎞선에 못 미칠 것이라는 판단 아래 작전을 폈다. 6관구가 매복선을 쳤을 때 남파공작원들은 이미 그 지점을 통과한 뒤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124군부대 사건 직후 우리 육군첩보부대는 특수공작원들을 북파했다. 이들이 원산에 상륙해 ‘상당한 작전’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도발하면 반드시 응징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 후 제3국에서 남북의 군첩보부대 고위참모가 만나 “서로 최고수뇌의 목숨을 노리는 공작은 삼가자”는 신사협정을 맺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그 후 1972년 5월 이후락(李厚洛)중앙정보부장이 김일성주석을 면담할 때 124군부대의 청와대 습격 기도를 항의하자 김주석이 “모험주의자들을 문책했다”고 공개한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맨 처음 북파공작원을 훈련시키고 지휘한 극비첩보부(HID)는 1948년 만들어졌다. 그것이 박정희 정부 이후 육군첩보부대(AIU)로 개칭됐다. 30㎏의 군장에 시속 12㎞의 산악주파라는 훈련목표가 말해주듯이 북파공작원은 말 그대로 인간병기(兵器)라 할 만하다. 정부는 그동안 공작원 북파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인정한다면 그것은 정전협정 위반을 자인하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냉전잔재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자 그 가족들이 보상을 요구하고 한 국회의원이 실태자료를 공개함으로써 북파공작원 문제가 공론화되는 것 같다. 한 시대사를 정리하는 의미일 수 있을 것이다.
<김재홍논설위원>nieman96@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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