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병기/'도서정가制'의 함정

  • 입력 2000년 10월 4일 18시 54분


최근 문화관광부가 입법예고한 출판 및 인쇄진흥법안에 포함된 ‘도서정가제 조항’을 놓고 찬반양론이 뜨겁다. 이 조항을 보면 문화부가 책의 특수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경제원칙을 무시했다는 느낌이다.

도서 정가제는 서점이 출판사가 정한 정가(소비자가격) 이하로는 책을 팔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것이 핵심내용.

현재 도서유통업계엔 오프라인과 온라인서점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인터넷 서점은 유통단계를 줄이고 인건비를 줄여 책값을 15∼30%가량 싸게 팔고 있다. 교보문고 등 대형서점들은 온라인판매는 하지만 가격은 깎아주지 않는다. 온라인에서 책을 싸게 팔면 서점을 찾는 고객이 줄어들 것을 염려한 것. 인터넷서점은 이 틈을 노려 시장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

기존 유통업자 입장에서는 괴롭지만 사회 전체적으로는 효율성이 증대되는 ‘창조적 파괴’ 과정이 진행되고 있는 것.

도서 정가제가 시행되면 이런 ‘창조적 파괴’가 중단되고 150개에 이르는 인터넷서점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아직 브랜드 이미지가 확고하지 못한 인터넷서점이 책을 대형서점보다 싸게 팔지 못한다면 소비자들은 인터넷서점을 외면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정부가 이런 식으로 기존 유통업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인터넷 판매업체의 발목을 잡는다면 디지털 경제로의 전환은 그만큼 늦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아도 기존 유통업자의 실력행사 때문에 자동차나 전자제품 등의 경우처럼 유통채널 효율화가 빠르게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곳이 많다.

미국에서도 아마존의 등장으로 대형 서점체인인 반스앤드노블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물론 기존 서점들도 “도서정가제를 하자”는 주장은 하지 않는다. 이런 말을 했다가는 비웃음을 살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경제부=이병기기자> ey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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