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진우칼럼]최고위원님 어디 계세요

  • 입력 2000년 10월 9일 19시 22분


어제 열린 여야(與野) 영수회담으로 국회법 개정안 날치기 처리 이후 70여일간 파행을 거듭해온 정국이 정상화의 출구를 찾은 것은 다행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우리 정치가 영수회담에만 의존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면 여전히 답답하다.

우두머리를 뜻하는 ‘영수(領袖)’란 낱말에서부터 권위주의적인 구시대의 냄새가 풀풀 풍긴다. 그렇다고 여야 총재회담이라고 하기도 뭣하다. 회담의 한 쪽 파트너가 여당총재이자 국가원수인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여당총재 자리를 내놓으면 어떨까도 싶고, 실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국민회의 대통령후보 수락 연설(97년 5월19일)에서 대통령에 당선되면 “당의 자율성과 국회의 독립성을 높이기 위해 당 총재직을 사퇴할 것”이라고 공언하기도 했다.

새삼스레 왜 약속을 안 지켰느냐고 따질 생각은 없다. DJ 없이는 무엇 하나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집권 여당의 체질적 한계로 보나 정부와 여당이 견제보다는 한 묶음으로 돌아가는 권력구조로 볼 때 대통령의 여당 총재 겸직이 불가피하다는 현실적 측면을 외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당의 자율성과 국회의 독립성’은 높아져야 했다. 그것이 정치개혁의 본질이다. 그런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거기에 근원적 문제가 있다.

▼입도 뻥긋 못한 최고위원▼

9월1일 민주당 최고위원회의가 청와대에서 열렸다. 전당대회 직후 열린 청와대회의는 민주당의 앞날과 함께 최고위원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런데 회의에 앞서 한 장의 유인물이 최고위원들 앞에 놓여졌다. 홍보위원장만 바꾸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유임시킨다는 당직 내용이었다. 당직 개편을 통한 당 쇄신책을 건의하려 했던 어느 최고위원은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고 한다.

당 총재인 대통령과 최고위원들의 정례모임도 원칙적으로 갖기로 했으나 구체적인 일정은 잡지 못했다. 그 후 한 달이 지나도록 자리가 마련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럴 수 있느냐고 따지고 나서는 최고위원도 없다. 당의 중심이 되어 정당정치를 활성화시켜야 할 최고위원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는 소리는 이래서 나온다.

김대통령의 집권 초기는 김중권(金重權)비서실장을 축으로 국정이 돌아갔다. 대행체제인 당은 ‘부속물’이었다. 옷로비 의혹사건 이후 핵심은 권노갑(權魯甲)최고위원, 한광옥(韓光玉)비서실장, 박지원(朴智元)전 문화관광부장관, 김옥두(金玉斗)사무총장 등 동교동계 구체제 중심으로 옮겨갔다. 영입인사와 전문가그룹은 새로 창당된 민주당의 ‘포장’인 격이었다. 어쨌든 민주당은 4월 총선에서 패배했다. 따라서 8월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을 뽑고 이들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당의 쇄신이 있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최고위원은 이름뿐이고 당 체제는 꿈적도 하지 않고 있다.

그동안 초재선 의원 ‘13인의 반란’ 등 변화를 위한 움직임이 있는가도 싶었지만 곧바로 ‘진압’됐다. 최근 당 연수원장과 홍보위원장을 사무총장 밑에 두기로 하면서 돌출했던 ‘제왕적 총장론’ 파문도 해프닝으로 끝났다. 당내 여론이 합의와 조율보다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통제되는 것이 아니냐는 뒷말만 무성할 뿐이다. 이러다 보니 당의 언로(言路)가 막히고 대통령에게 민의가 제대로 전달되느냐는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야당인 한나라당은 뭐 별다르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상대 탓부터 할 일은 아니다. 집권당이 변하면 야당은 따라올 수밖에 없다.

▼정당부터 살려야 한다▼

김대통령도 말했듯이 국회가 정치의 중심이 돼야 한다. 국회가 정치의 중심이 되려면 정당이 살아나야 하고, 정당이 살려면 의원들의 총의가 당론으로 수렴되어야 한다. 당 지도부의 생각이 곧 당론이 되고 그에 반대하면 ‘반란’이 되어서야 정당이 살 수가 없다. 정당이 못사는데 정당정치가 있을 리 만무하다. 이러다 보니 여야가 죽자 사자 기싸움을 벌여도 이를 풀어낼 정치는 작동불능이다. 결국 지난번에도 그랬던 것처럼 국정이 꼬일 대로 꼬이고 국가적 손실과 민생의 폐해가 극에 달해서야 여야 영수가 만나 상생(相生)을 얘기한다.

이제 보다 나은 영수회담을 보고 싶다. 어제 여야 영수는 앞으로 두 달에 한번씩 만나기로 했다. 좋은 일이다. 다만 만남의 성과를 위해서는 정당부터 살려야 한다.대통령이 종종 야당총재를 불러 국정을 논의하고 협력을 구하는 ‘큰 정치’의 만남이 더 자연스럽지 않겠는가.

<전진우 논설위원>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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