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영균/'정치'보다는 '정책'을 택하라

  • 입력 2000년 10월 12일 18시 40분


사람들은 지난 일을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성향이 있다. 개인적인 일이나 국가적인 일이나 마찬가지다. 과거의 어려웠던 시절은 더욱 그렇다.

호황 때는 과거의 불황시절을 잊기 쉽다. 40평형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20평형 아파트에 전세 살던 때를 잊고 싶어한다. 다시 그런 시절이 찾아올까 두려운 게 아닐까.

그러나 호황이 지나면 불황이 찾아오게 돼있다. 호황기를 길게 하고 불황기를 짧게 줄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호경기만을 기대할 수는 없다. 전무후무한 호황을 누리고 있다는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의 미국 증시가 이런 교훈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요즘 경기사이클은 과거와 다르다. 특히 한국에선 80년대 후반부터 경기의 흐름이 크게 달라졌다. 호황과 불황이 번갈아 바뀌는 사이클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주기가 달라졌다.

경기사이클 주기가 대통령 임기와 같아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노태우 대통령 집권 이후부터 그런 모습이다. 정권 초기에는 경기가 좋았다가 후반기를 지나면 불황이 찾아온다.

주가도 마찬가지다. 대개 정권이 시작할 때부터 오르기 시작한 주가는 집권 후반기로 가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집권 초창기에 경제를 살리려고 부양책을 썼지만 약효가 오래가지 못한 것이다.

노태우 정권 때는 주택 200만가구 건설이 경기를 끌어올렸고 김영삼 정권 시절에는 신경제 100일계획으로 경기를 부추겼다. 이번 정권에서는 벤처열풍이 한몫 단단히 했다. 벤처바람이 경제위기 극복의 일등공신으로 치부될 정도였다.

경기에 따라 대통령의 인기도 오르내렸다. 집권초기엔 엄청난 지지율을 보이다가 막판엔 급락하는 게 관례였다. 최근 경기가 급락하는 걸로 미루어 볼 때 지금 지지율은 크게 낮아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경제를 챙기겠다고 나설 정도다.

그러나 집권자가 인기를 높이기 위해 경기를 임의로 조절하는 것은 국가경제에 헤아릴 수 없는 악영향을 끼친다. 경기과열로 물가가 급등하는가 하면 경기침체로 심각한 실업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이미 경험했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앨런 그린스펀 의장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사실 대통령의 경기조절욕망을 억제하는 일이다. 그래서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경제대통령’으로서 금리 통화의 주요 정책을 독립적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

요즘 우리 경제는 급격히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미국만이 아니라 한국 경제의 경착륙을 걱정해야 할 형편이다. 벤처열풍이 차갑게 식고 증시가 얼어붙은 탓이다.

최근 거론되고 있는 신도시 건설계획은 경기를 되살리는 데 목적이 있는 것 같다. 건설부문이 경기부양효과가 가장 빠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처방이 과연 경기를 제대로 뜨게 할 수 있을까.

신도시 건설에 따른 자재난 등의 역효과는 제쳐두고라도 경기를 살린다는 목표도 쉽지 않을 것 같다. 디지털 경제에서 경기를 살리려면 정보통신 분야의 기술개발을 유도하거나 증시를 살리는 게 지름길이다. 미래의 국가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도 자원을 보다 효율적인 분야에 집중되도록 하는 게 필요한 때다.

집권기간중 당장 경기를 살리려는 ‘정치’보다는 보다 먼 장래를 대비하는 ‘정책’을 선택하는 지혜를 기대해본다.

박영균기자<금융부장>parky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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