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기정/격동 한반도 남북이 주역

  • 입력 2000년 10월 12일 18시 40분


바야흐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에 지각변동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조명록 북한특사는 워싱턴을 방문, 미국 수뇌부와 일련의 회담을 가진 뒤 빌 클린턴 대통령의 연내 방북을 요청했다. 이를 위해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곧 평양을 방문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실로 놀라운 변화가 빠른 속도로 우리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김정일의 북한은 뭔가 크게 결심한 듯하다. 안으로는 조선노동당 창건행사를 성대하게 치르는 한편, 밖으로는 미국을 상대로 대담한 수순을 전개하고 있다. 북한식 표현으로라면 ‘적의 심장부’에 제2인자를 보내어 체제생존을 위하여 ‘정면돌파’를 시도하고 있다. 김정일로서는 클린턴의 민주당 정권과 마지막 담판을 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미국 대선 이후 북―미 관계가 90년대의 상황으로 되돌아가 다시 위협과 줄타기 외교의 위험스러운 반복을 염려한 것이다. 차제에 정면돌파라는 카드를 꺼내 들고 미사일문제와 테러지원국 해제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서고 있는 것이다.

미국으로서도 기다렸다는 듯 대응하고 있다. 90년대 이래 몇차례 고비를 넘기면서 만들어 낸 대북 합의들의 논리적 귀결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른바 ‘페리 프로세스’의 당연하고 적절한 단계라는 것이다. 북한에 대한 미국의 일차적 관심사는 미사일문제다. 북한이 미사일과 체제 생존 문제를 연계하여 대미 관계개선 의지를 보일 때 미국으로서는 거부할 명분이 없다. 북―미 관계 정상화를 향한 조치들이 급물살을 타게 될 것은 이제 명백한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한반도 문제는 두 개의 축에 의해 방향이 결정된다. 국제적 축이 하나요, 민족적 축이 다른 하나다. 이 두 축에 의해 맞물리는 동력 사이에는 상호보완적 요인도 있고, 상호견제적 성격도 존재한다. 6·15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남북간 화해 협력의 구도가 정착돼 가면서 국제적 축의 동력이 일시적으로 미약하게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다. 국제적 축의 핵심 키는 미국이 쥐고 있고, 따라서 북―미 관계의 급진전은 한반도 문제의 국제화 측면을 다시 부각시키고 있다. 이제 다시 미국이 무대의 전면에 나선 것이다.

미국이 추구하는 동북아 정책의 핵심은 안정적 질서의 유지다. 그것의 시금석이 한반도 문제요, 북한변수다. 따라서 미국은 남북한 양측에 대해 지역 질서유지를 위한 지렛대를 갖고자 한다. 한국에 대해서는 군사동맹관계를 통해, 북한에 대해서는 핵 및 미사일문제와 관련된 합의들을 통해 통제력을 가지려는 것이다. 미국은 북―미관계 틀을 한 단계 격상시키기에 호기를 맞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를 통해 중국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견제책을 유지하면서 한반도 문제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확실히 챙겨 두려 한다.

따라서 북―미 관계의 발전은 국제축과 민족축이 맞물리는 한반도 삼각구도를 현실화시킨다. 한국, 북한, 미국을 쌍방향으로 잇고 있는 명분과 담론은 각각 ‘화해 협력’, ‘공조’, 그리고 ‘우호 친선’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잘 짜여진 구도다.

그러나 지금부터다. 한반도 평화체제라는 공동 목표를 가지고 있으되 구축방법을 두고 서로의 해석과 접근법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로서는 평화체제 구축에 남북한 당사자 원칙 준수가 중요하다. 북한은 종래의 ‘통미봉남(通美封南)’ 구도 부활이 현시점에서 현명한 책략이 되지 못함을 알아야 한다. 어차피 미국에 대해 일정 정도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남북한 공유 영역인 민족축이 보존돼야 하기 때문이다. 6·15선언의 실천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이제 북한이 전면에 나섰다. 제발로 국제사회로 걸어나오고 있다. 향후 북한의 수순과 행보가 미국과 국제사회의 특별한 주목을 받는다고 하여 괘념하거나 몸달아 할 필요는 없다. 한―미 공조체제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긍정적으로 작동시키면서 한반도 삼각구도 속에서 당당한 우리의 목소리를 가다듬어야 할 때다.

김기정(연세대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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