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보의 옛날신문 읽기]보리밥을 잘 먹어 표창장을 수여함

  • 입력 2000년 10월 13일 14시 03분


요즘 북한에 쌀 60만 톤을 주는 문제로 여기저기서 시끄러운 모양입니다. 쌀하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어떤 이미지가 머리에 떠오르나요.(바보같은 질문이죠?)

하여튼 세대에 따라 다를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 배를 채워야 하는 시대를 살았던 구세대와, 고급 양식당을 찾아 다니며 바다 건너온 이국의 맛을 음미하는 신세대는 다를 수밖에 없겠지요.

네, 오늘은 쌀 얘기를 하렵니다.

신세대 중에는 혼분식이란 말 자체를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쌀이 귀하니 보리를 섞어 먹자는, 보리마저 귀하니 대신 밀가루를 먹자는 그 혼분식 말이죠.

동아일보 76년 6월12일자에는 이런 기사가 실려있습니다.

문교부가 지시한 혼분식 장려를 대부분의 학교들이 지나치게 확대해석, 많은 물의를 빚고 있다.

문교부가 올해 새 학기부터 각급 학교에 실시중인 도시락 혼분식 장려운동을 감독 관청인 각 시,도교위나 일선 학교 관계자들이 지나치게 확대 해석, 학생들의 성적에까지 반영시키는가 하면 처벌까지 하고 학부모들을 불러 이행각서를 쓰게 하는 등 과잉단속으로 물의를 빚고 있다.

일부 학교에서는 문교부의 혼식 비율기준 30%를 아예 50%로 높여 책정하고 있으며 숫제 학생들로부터 돈을 거두어 빵이나 우유를 단체 구입해서 나누어 주거나 빵만을 싸오도록 강요, 학부모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경우도 적지 않다.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ㅈ여중의 경우 조회시간에 학생들의 도시락을 일제히 검사, 잡곡을 50% 이상 섞지 않은 학생은 1주일 동안 실내 청소를 시키고 해당 학부모를 학교로 불러 이행각서를 쓰게 하고 있으며 중구 옥수동 ㅈ여중에서도 담임교사가 매일 도시락 점검을 하여 이행이 안된 학생은 도덕성적에 반영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또 성동구 ㅎ중학교와 ㅁ여중에서는 학생들의 혼식 성적을 통지서에까지 기입, 부모의 확인도장을 받아오게 하고 있으며 종로구 안국동 ㅍ여고 등에서는 학급별 혼식 이행 통제를 작성, 잡곡을 가장 많이 섞는 도시락 지참 학급에 대해 표창을 하고 도시락을 싸오지 않은 학생들도 혼식 불이행자로 간주, 교실 청소들의 벌을 주고 있다는 것.

이같은 과잉단속은 국민학교가 더욱 심해 동대문구 회기동 ㄱ국민학교에서는 1주일에 2일을 무미일(분식일)로 정하고 학생 1명당 월 6백30원씩을 거둬 빵과 우유를 공동 구입하여 급식 시키고 있으며 성동구 ㅎ국교에서는 도시락 검사에서 30% 이상 잡곡을 섞지 않은 학생은 벌로 수업시간에 세워두기도 한다는 것이다. 동대문구 ㅅ국교의 경우는 혼식 비율을 숫제 50% 이상으로 높여 불이행 학생들의 도시락을 압수하기도 하며 극빈학생으로 점심을 갖고 오지 못하는 학생들도 일단 불이행자로 간주, 가정환경조사를 다시 하기도 하여 어린이들에게 열등감을 안겨 주는 등 동심을 명들게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하략)

신세대들은 우리에게 이런 시절이 있었나 하고 어리둥절해 할지도 모르겠군요. 그러나 60~70년대 소년기를 보냈던 분들은 기억에 생생할 겁니다.

당시 학생과 학부형, 교사들은 강압적인 혼분식 장려 운동 때문에 큰 고생 했습니다.

도시락을 싸야 하는 어머니들 중에는 아침마다 밥을 두번 짓는 분도 있었습니다. 집에서 먹는 밥과 도시락용 밥, 이렇게. 전기밥솥마저 귀하던 시절, 연탄에 밥을 두번씩 지어야 했으니 오죽 힘들었겠습니까.

어떤 어머니들은 아이에게 빵 한개를 책가방에 넣어주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게 또 보통 문제가 아니었죠. 빵값마저 가계에 부담이 되던 시절이었으니까.

교사들의 불만도 대단했습니다. 일선 교사들은 관의 과잉지도 때문에 학생들을 닥달해야 했던 것입니다.

특히 교육청에서 수시로 단속을 나왔지요. 교사들 가운데는 도시락 점검 때문에 수업에 지장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제게도 혼분식에 관한 기억이 있습니다.

70년대 초반, 서울 전농동에 있는 전동초등학교 5학년 5반 시절입니다. 당시 담임이었던 이은수 선생님은 툭하면 “영양학적으로 쌀보다 밀가루가 훨씬 훌륭하다”는 강의를 하셨지요.

근데 어느날, 조경원이라는 아이 하나가 사실은 그게 아니라고 부정하고 나섰습니다. 그 애는 “아버지가 그러시는데, 사실은 쌀이 밀가루보다 훌륭하며, 담임의 말은 거짓”이라고 반박했습니다.(놈의 표정과 말투에는 진실을 밝히는 자 특유의 떨림과 희열이 있었지요.)

반 아이들은 다 놀랐습니다. 분노한 이은수 선생님은 그 녀석을 매우 ........치셨습니다......... 이렇게 소리소리 지르시면서.

“임마, 네 아버지가 말이 맞아, 내 말이 맞아?”

세월이 흘러 76년, 서울 용문고등학교 2학년 시절입니다. 저의 어머니 김득중 여사는 그날 아침 깜박하셨는지 쌀밥을 지으시는 실수를 저지르셨습니다.

뒤늦게 실수를 발견하신 여사는 “늘보야, 어떡허냐....”면서 큰 걱정을 하셨습니다. 늘보는 “어머니, 걱정마세요. 별일 없을 겁니다” 하면서 씩씩하게 등교길에 올랐지요.

가는 날이 장날입니다. 그날 대대적인 도시락 검사가 있었지요. 키가 작아 땅콩이란 별호를 갖고 계시던 훈육주임께서 직접 우리반에 왕림하셨습니다.(아이들 사이에 `땅콩=공포'였습니다)

내 도시락의 흰 쌀밥을 보신 그 분은 저를 매우 치셨습니다. 이렇게 소리소리 지르시면서.

“이 애국심이라곤 코딱지만큼도 없는 놈!”

늘보<문화평론가>letitb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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