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교수의 법과 영화사이]이사야 지키기

  • 입력 2000년 10월 19일 19시 36분


<이사야 지키기> (Losing Isaiah, 1995)

출연: Jessica Lange, Halle Berry

감독: Stephen Gyllenhaal

"어린아이가 길을 인도하리라." 그때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면,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구약성경 이사야 11장 6절)

예언자 이사야의 입을 빌어 성경은 완벽한 평화의 구현으로 어린아이의 세상을 그렸다. "어린아이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에프스키도 최후의 대작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에서 조국의 장래는 어린이에 달렸다고 역설한다.

영화 <이사야 지키기>(Losing Isaiah)는 인종간의 차별과 분리라는 이월부채를 지닌 미국사회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기하는 영화이다. 그 가능성은 인종적 편견이 생기기 이전의 어린아이의 인도를 통해 실현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영화는 <크래머 대 크래머>(Kramer v Kramer, 1979) 이래 미국 영화의 한 세부장르를 이루고 있는 동거양육권(child custody)의 문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하는 작품이다. 이를테면 미국판 "기른 정" 대 "낳은 정"의 대결인 셈이다.

사이렌 소리가 화려한 조명의 시카고의 밤을 가른다. 이 거대한 도시의 한 가운데 버려진 건물 속에서 부랑자(homeless)들이 살고 있다. 모두 흑인이다. 중년여인이 옆자리의 젊은 여인에게 아이가 운다고 핀잔을 준다. 인생의 막장에 몰린 사람에게는 새 생명에 대한 배려를 기대할 수 없다. 인생 자체가 고통인 것이다. 젊은 아이 엄마는 마약을 흡입하여 고통을 달랜다. 환각상태에서 종이 박스에 아이를 넣어 인근의 대형 쓰레기통에 버린다. "잠시만 있어 아가야. 다시 찾으러 올게."라고 자신에게 애원의 다짐을 보내면서.

청소부가 이를 발견하고 병원 응급실로 보낸다. 아이의 신원은 생후 3일 지난 이사야(미국식 발음 아이제이어) 리처드임이 확인된다. 버려진 아이의 회생과정을 지켜본 병원의 사회 사업사인 백인여성 마가렛은 알 수 없는 생명의 신비감에 이끌려 아이의 입양을 원한다. 모든 일에 외조를 아끼지 않는 남편과 딸 하나(Hannah)는 처음에는 미온적이나 일단 입양 절차가 완료되자 사랑으로 어린 새 식구를 감싼다. 아이가 태중에 있을 때 모체가 흡입한 코카인의 영향으로 여러 가지 이상 증세를 보이고 그만큼 양육이 힘들다.

수퍼 마켓에서 음식을 훔친 칼리아는 소액절도죄로 수감되고 모범수의 생활 끝에 재활과정을 거친다. 비로소 글을 배우고 마약도 끊는다. 지난 3년 내내 아이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린 그녀는 재활의 과정에서 알게된 사회사업사의 격려와 도움으로 자신의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백인 가정에 입양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제 그녀는 아들을 되찾아 나선다. "다시 찾으러 올게"라는 자신에게 내걸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기도 하다. 흑인 아동은 백인 가정에 입양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 법률구조기금의 흑인변호사 루이스가 사건을 맡는다. 루이스의 조언에 의해 칼리아는 보다 환경이 좋은 곳으로 주거를 옮기고 간통 상태에 있던 유부남과의 관계도 청산한다.

이사야를 지키려는 마가렛부부는 흑인 여자 변호사를 고용한다. 흑인 아동의 양육권을 얻기 위해서는 흑인변호사를 고용하는 것이 더욱 도움이 되리라는 계산이었지만 변호사는 "법은 색맹" (law is color-blind)이라는 유명한 법언(法諺)으로 자신이 맡을 사건에서 색채를 걷어낸다. 이 말의 유래는 공적 시설에서 흑백의 분리를 인정하면서 "분리하되 평등" (separate but equal)이라는 헌법의 원칙을 선언한 1879년의 연방대법원(Plessy v. Ferguson) 판결에서 John Harlan판사가 쓴 반대의견이다. 이 명구는 후일 그 유명한 브라운판결 (Brown v. Board of Education, 1954)에서 "분리 그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평등" (separation in inherently unequal)이라는 새로운 법리를 통해 부활된다. 그러나 법은 색맹(color-blind)라고 공식으로 선언했지만 현실사회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사적 영역은 엄연히 편견의 성 위에

건설된 것이다.

중산층 백인 가정에서 흑인 어린아이는 비교적 잘 자란다. 이따금씩 이제 열살 갓 넘은 딸 하나에게는 갈등과 불편이 일어나곤 하지만 인내와 관용, 그리고 부모의 인성교육으로 극복된다. 둘의 손바닥을 함께 펴 보이며 "내 손과 네 손이 어떻게 다르니"라는 백인 소녀 하나의 질문에 "내 손이 좀 작아"라고 답하는 흑인 아동 이사야, 아이의 눈에는 색깔보다 크기가 먼저 끌린다.

시카고의 초라한 법정에서 양육권 재판이 열린다. 칼리아는 자신이 결코 입양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마가렛 측은 아이를 내다 버린 것은 이러한 동의의 권리를 포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법이 요구하는 대로 신문광고와 인터넷을 통한 공시절차를 밟았고 그 결과 입양절차가 이미 완료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제는 단정한 차림에 세련된 언어를 구사하는 칼리아는 법정에서 아들 이야기를 할 때마다 눈물을 감추지 못하는 모정(母情)이 넘치는 어머니이다. 한때는 매음과 마약에 손대었지만 이제는 모든 면에서 현모(賢母)가 될 준비가 되어있다고 주장한다.

아이를 쓰레기더미처럼 내다 버린 쓰레기인간이 갑자기 "테레사 성녀처럼 행세하는" 칼리아를 마가렛은 노골적으로 경멸한다. 변호사는 마약 문제를 집중 거론하면서 칼리아가 어머니 자격이 없음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나를 아이의 엄마라고 명하셨어"라고 주장하는 칼리아에 대해 마가렛은 '너 같은 인간은 하나님을 팔 자격이 없다'라고 맞선다.

"이사야를 잃는 것은" (losing Isaiah) 모든 것을 다 잃는 것이다. 아이에게는 문화적 여건이 더없이 소중하다는 사회 사업사로서의 소명의식에 그 동안 기른 모정이 겹친다. 마가렛으로서는 결코 물러설 수 없는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사투이다. 아이의 쟁탈을 위한 법정공방은 여느 재판 못지 않게 추악한 인간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상대방의 약점을 파헤치는 온갖 작태가 벌어진다. 칼리아의 매음 전력과 마가렛의 남편 (아이의 양부)의 하룻밤 외도사실도 밝혀진다. 마가렛부부는 저녁식사에 흑인을 초대한 적도 없고 이사야에게 흑인 아동을 위한 동화를 읽어준 적도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장기적 관점에서 '아동의 복지를 위한 최선'의(best interest of child) 결정이 무엇인지 모른다. 사회사업사의 증언도 분분하다. 인종간의 입양에 대한 (trans-racial adoption) 수

많은 연구가 있지만 어느 한쪽으로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 경제적 부양능력도 숨은 의제의 하나이다.

격론을 청취한 판사는 고심 끝에 생모에게 아이를 줄 것을 명하고 그것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흑인 아이의 복지를 위해 최선임을 강조한다. 판사의 결정은 미국사회의 보편적인 입양관행을 대변한다. 흑인 사회사업자 협회( National Association of Social Workers)는 흑인 아동이 백인 양부모에 입양되는 것을 반대한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캘리포니아와 미네소타 주에서는 입양시 가능하면 같은 인종의 양부모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법이 모든 것을 해결하지 못한다. 아이를 인도 받은 칼리아는 어머니로서의 정성을 다하나 감당하지 못한다. 키운 엄마로부터 떨어짐을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아이는 낳은 엄마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음식도, 잠자리도, 친구도 거부하고 오로지 '진짜 엄마'를 찾아 울음을 그치지 아니한다. 법의 이름으로 아이를 빼앗긴 기른 엄마도 마찬가지다. 실의를 넘어 가히 강박상태에 빠진 마가렛을 남편이 위로하려드나 소용이 없다. 남편 또한 아내와 마찬가지로 기른 아이의 존재가 그토록 귀중한 줄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마침내 칼리아는 마가렛의 도움을 청한다. 절대로 자식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를 위해 일시적인 도움을 청할 뿐이라고 조건을 단다. 울음을 그치지 않고 악을 쓰던 아이는 마가렛을 보는 순간 "마미"라고 부르면 달려들어 포옹한다. 아이가 두 어미의 사이에서 조화로운 공존을 주도하는 장면이 비쳐지고 이어 예의 성경구절이 떠오르면서 영화는 막을 닫는다.

이 영화는 아동의 성장에 있어 염색체보다 후천적, 문화적 여건이 더욱 중요함을 강조한다. 마크 트웨인의 만년의 수작, <바보 윌슨>(The Tragedy of Pudd'nhead Wilson, 1894)에 담긴 메시지이다. 어린 시절에 바꿔치기 당한 흑, 백의 아이는 각각 자신이 자란 문화적 환경에 따라 백과 흑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생물학적 법칙과 혈연보다는 사회적 통합과 인간의 애정이 더욱 중요하고 그리하여 새 세기의 인류는 인종적 편견을 극복하는 새로운 통합을 이룰 것이라는 꿈을 제시한다.

인종적 편견이 만연한 세계 제일의 고아 수출국, <수전 브링크의 아리랑>의 나라 사람들이 얼마 전에 타계한 홀트 할머니의 영전에 속죄하는 마음으로, 가슴에 손을 얹고 봐야 할 영화다.

안경환<서울대 법대 교수>ahnkw@plaz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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