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훈의 책·사람·세상]辭典은 국력

  • 입력 2000년 10월 20일 19시 00분


‘Dictionary of American Regional English’라는 사전이 있다. 문어보다는 구어, 그것도 학교에서 배우는 영어가 아니라, 각 지역에서 태어난 미국인들이 가정에서 익히고 사용하는 살아 있는 구어의 차이를 정리하는 장기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현재 제4권을 편찬 중인데, 제4권은 P에서 R, 그리고 S의 일부 항목을 담게 된다. 특기할만한 것은, 미국 각지의 일반인들이 사전 편찬에 자발적으로 동참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미국 각지에서 사용되는 일상 언어를 수록하려면 각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언어생활 체계적 반성 기회◇

사실 그런 사전이 없어도 일반인들의 언어 생활에는 불편함이 없다. 늘 사전을 들고 다니면서 말을 할 때마다 사전을 들추어보는 일은 가능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으니 말이다. 역설적인지도 모르지만, 바로 여기에 사전이 지닐 수 있는 일종의 철학 같은 것이 있다. 요컨대 사전은 사람이 스스로를 되새겨 볼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사례가 된다. 언어문자생활을 체계적으로 반성, 정리, 재구축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능력’이다.

번역 또는 집필 활동을 하는 주위 분들이 제대로 된 사전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곤 한다. 특정 분야의 전문용어로 들어가면 믿을 수 있는 사전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물론 사전 편찬의 어려움이야 두말할 나위 없다. 출판사의 입장에서는 비용, 시간, 인력 등의 측면에서 섣불리 시작하기 힘들다. 더구나 힘들게 출간해도, 사전을 구입하거나 최소한 그 노고만이라도 알아주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다.

결국 문화, 출판 관련 정책 당국이 해야 할 ‘국가의 일’은 분명하다. 사전 편찬, 특히 특정 분야의 전문용어 사전 편찬에 대한 각별한 지원이 필요하다. 사전 편찬에 대한 지원을 무형의 문화적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미래에 대한 투자, 문화 공공재의 확충이라고 보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더구나 디지털 매체의 대두와 함께, 사전 콘텐츠의 디지털화에 따르는 관련 기술 노하우의 축적이라는 부수적 효과도 만만치 않다.

◇국가차원서 사전편찬 지원◇

실제로 옥스퍼드 영어사전(OED) 온라인판 제작 과정은(http://www.ariadne.ac.uk/issue24/oed―tech) 이른바 SGML(Standard Generalized Markup Language) 관련 기술의 훌륭한 응용 사례가 되고 있다. 사전은 단순히 말의 뜻을 풀어 설명해놓은 도구가 아니다. ‘철학은 말에 대한 심원하고 창조적인 탐색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1942년에 나치에 의해 총살당한 화가이자 작가 브루노 슐츠의 말이다.

(출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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