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은 전주를 노리고 가까운 금산까지 밀려오고 있었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전주의 선비 안의와 손홍록은 그때까지 편찬된 804권의 실록을 지게에 실어 내장산의 한 동굴로 옮겼다. 이들은 1년여 동안 번갈아 가며 동굴 앞을 지키면서 실록을 보존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고 한다. 이들이 없었더라면 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은 후대에 전해질 수 없었다. 전쟁통에도 자신의 안위를 포기한 채 실록을 지켜낸 두 선비의 문화재 사랑이 감동을 준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6·25 때도 있었음이 뒤늦게 밝혀졌다. 미술사학계의 원로 진홍섭 박사의 숨겨진 스토리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국립개성박물관장으로 있던 진씨는 미처 시간이 모자라 서울로 옮기지 못한 문화재 10여점을 땅속에 묻어 두고 남쪽으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이 문화재는 고려청자와 석불 등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은 국보급이라는 게 진씨의 증언이다. 땅속이야말로 문화재를 보관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이므로 지금도 개성 땅 어디엔가 유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을 것이다.
▷선조들이 남긴 문화유산을 대하게 되면 우리가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큼 ‘문화민족’이었음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경제적으로는 풍족해졌으면서도 우리 문화를 보존하고 계승하려는 의식면에서는 오히려 전보다 못하다는 데 아쉬움이 남는다. 한가지 예로 국악과 같은 전통 문화는 극소수에 의해 근근히 명맥을 이어가는 형편이다. 얼마 전 풍납토성 보존 문제에서 나타났듯이 개발논리가 늘 문화재 보존논리를 앞서고 있다. 82세의 고령인 진씨의 문화재 사랑이 돋보이는 것은 그와 같이 우리 문화 보존에 헌신적인 의인(義人)을 만나기가 점점 힘들어지기 때문이리라.
<홍찬식논설위원>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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