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 프리즘]서병훈/‘인간의 얼굴’을 한 진보

  • 입력 2000년 10월 24일 18시 36분


지난주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를 겨냥해 세계 곳곳에서 모인 진보적 사회운동가들이 20일 발표한 ‘서울선언문’은 두 가지 점에서 눈길을 끈다. 그들은 ‘세상을 바꾸자’고 외쳤다. 신자유주의의 위세에 눌려 다들 손을 놓고 있는 상황인데 ‘아직도’ 세상을 바꾸자고 주장하니 그 배포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대안으로 내세우는 것들의 면면이 너무나 소박하다. 그 정도로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면 무엇이 걱정이겠는가.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윤보다는 인간을’ 강조했다는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얼굴’을 진보의 기준으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사실 지난 연대에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나아가서는 ‘자본주의에다 인간의 얼굴을 덧붙이는 일’에 대한 모색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 뿐, 이런 몸부림들은 신자유주의의 도전 앞에서 모두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이렇게 잊혀졌던 인간의 얼굴이 지난주 서울에서 다시 부활했으니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거에는 무엇이 진보인가에 대해 생각이 구구했었다. 물질의 풍요를 진보의 핵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그 반대로 평등의 확산을 진보의 요체로 간주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이런 기준은 대체로 단편적이거나 지엽적인 것에 불과했다. 수단은 될지언정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서구사회에서 국가의 역할을 둘러싸고 진보라는 말이 어지러울 정도로 유전(流轉)을 거듭한 것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한때는 자유방임이 진보의 표상으로 여겨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모순이 구체화되면서 국가의 적극적 개입을 상정한 복지국가의 등장이 진보와 동일시됐다. 다시 시대가 흘러 20세기 후반이 되면 국가의 간섭은 극복의 대상이 되고 신자유주의가 새로운 진보의 표상으로 자리잡게 된다. 회의만 춤추는 것이 아니다. 진보도 함께 춤을 추었다. 그러니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이제는 진보의 개념에 대해 어느 정도 합의가 된 것 같다. 결국은 인간, 다시 말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모든 논의의 결론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주는 것, 이것이 진보의 조건이자 목표가 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인간의 얼굴’을 어떻게 그리느냐에 달려 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적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지난 역사를 잠깐 돌아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동안 인간이 이룩한 성취가 많고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자유의 제도화와 평등의 확대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 어떤 가치보다도 자유는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자유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평등이 확보돼야 한다. 여러 한계가 있지만 자유민주주의가 이 시대 유일의 정치적 대안으로 자리를 굳히게 된 것도 이 체제가 바로 자유와 평등을 내면화할 기제(機制)를 구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등을 바탕으로 한 ‘열린 사회’의 건설은 인간답게 살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인간의 얼굴을 그리는 작업은 이 토대 위에서 시작돼야 한다. 물질이 우리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어떻게 과소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것이 결코 전부가 돼서는 안된다. 신자유주의 철학이 한계를 보이는 것은 바로 이 대목에서이다. 효율만능주의에 빠져 있으면 인간의 존재에 대해 고민할 여유가 없다. 이웃에 시선을 보낼 줄도 모르게 된다. 더 큰 문제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삶의 현상에 대해 창조적 비판을 할 수 없게 된다는 데 있다. 자유와 ‘위대한 거절’, 이것이 진보의 표상이 돼야 한다.

작금의 한국 지성계는 어지럽다. 신자유주의자와 ‘고전적’ 사회주의자들이 제각기 진보를 자임하고 있다. 여기에 북한 문제까지 끼어들면 사정은 더욱 복잡해진다. 진보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 진보가 이름값을 하자면 자유, 그리고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이 전제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껍데기가 되고 만다. 좌우간 껍데기는 사라져야 한다.

서병훈(숭실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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