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경택칼럼]당신들만의 잔치

  • 입력 2000년 10월 25일 18시 38분


2년 전 IMF 위기 극복을 위해, '개혁’이란 이름으로 수만명의 가장들이 은행에서, 기업에서 쫓겨났다. 올 겨울에도 수천명이 구조조정의 희생자가 되어야 할 판이다. 몇몇 은행은 요즘 명예퇴직자 신청을 받고 살생부(殺生簿)를 만드느라 뒤숭숭하다고 한다.

이런 구조조정을 채찍질해야 하는 금융감독원은 개혁의 핵심기구다. 여기가 썩고 있었다. 주식투자를 해서는 안되는 금감원 간부가 주식투자를 하고 주식을 상납받은데다 손실분은 뇌물로 받아 채웠다니 더 할 말이 없다. 금융기관이나 기업에는 구조조정을 하라고 다그치면서 그들은 뒷전에서 주식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한빛 게이트’에 이어 또 하나의 게이트가 생겨났다. '정현준 게이트’라고 해야 하나. 불법대출금 400여억원의 행방에 의문이 쏠리는 가운데 정관계에 대한 로비의혹이 무성하다. 코스닥시장 주변에서는 K씨 등 정권 실세들의 개입의혹이 꼬리를 물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4·13총선자금의 상당부분을 벤처시장에서 만들어 갔다는 얘기가 공공연한 비밀처럼 나돈다. 대통령은 개혁이 왜 늦어지느냐고 호통을 쳤지만 그 원인은 가까운 데 있었던 셈이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노벨평화상 수상에 이어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를 무난히 마친 후 "이젠 내치(內治)”라고 했다. 경제와 민생을 챙기면서 개혁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얘기다.

그러나 일반 국민에게 그 말은 공허하게만 들린다. 개혁대상 중에도 공기업 개혁을 서둘러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 지가 언젠데 구조조정을 앞둔 공기업에서 법인카드로 1년반 동안 술값으로 19억원이나, 더욱이 안마시술소 이발소 사우나 골프연습장 등에서 많게는 수백만원씩 펑펑 써댔다니, 그동안의 개혁은 그야말로 말뿐이었다는 것 아닌가. 이러니 개혁 냉소주의가 번져나갈 수밖에 없다.

김대통령 주변부터 제대로 개혁이 되어 가는지, 손을 볼 곳은 없는지 살펴야 한다.

우선 가깝게는 대통령이 총재로 있는 민주당이다. 국회법 개정 날치기로 국회가 두 달 이상이나 파행을 계속해왔는데도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데가 집권여당인 민주당이다. 최고위원이라고 뽑아놨지만 대통령 눈치보기에 급급한 상황은 여전하다. '386의원’이나 초재선의원의 바른 소리도 한순간 지나가는 바람일 뿐이다. 당 대표라는 분이야 있지만 그저 대표일 뿐이고 여전히 '제왕적 사무총장’을 비롯한 이른바 동교동계 지배의 세계다. 이런 체제에서 곧은 소리가 대통령에게 제대로 올라갈 수 있겠는지, 모든 개혁에 앞장서야 할 정치개혁이 제대로 되겠느냐는 의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김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은 온 국민이 큰 박수를 보내야 할 일이지만 사회 분위기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노벨상 수상 후 남북관계가 더 순조롭게 풀려갈 것으로 기대했으나 실제는 정반대다. 북한은 거의 모든 남북관계 일정을 일방적으로 무산시키고 있다. 이러다 보니 이산가족들이 고대하는 2차상봉도 예정일을 못 지키는 것은 물론 언제 실현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정부에서는 북한이 남북과 북미관계 개선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시킬 수 있는 인적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지만 꼭 그런 것인지, 북한의 본심이 궁금하다.

그런데 우리가 주기로 한 식량은 속속 북으로 실려가고 있다. 국민의 동의를 받으라는 여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남북간 식량차관계약서에 서명도 하기 전에 식량은 선적됐다. 그 식량이 어떻게 배분되는지도 우리는 모르는 상황이다.

'남북평화열차’는 국민과 함께, 야당과 함께 타고 가야 하는데도 뭐가 그리 급한지 정부는 혼자 몰고 간다. 그렇게 서두르다 보니 그 식량에는 남한 국민의 마음이 담길 수가 없다. 이러니까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정착 노력으로 노벨상을 받았다 해도 그것은 '당신만의 상’이 아니냐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개혁도 그렇고 남북평화정착 노력도 온 국민과 함께 그 근본정신을 공유하는 데서 실질적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당신만이 외치는 개혁, 당신만이 타고 가는 평화열차는 제 길을 가기 어렵다. 이렇게 되면 민심은 멀어져 간다.

<어경택 논설실장> euh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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