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식의 과학생각]'실패학'이 필요한 사회

  • 입력 2000년 10월 25일 18시 57분


우리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제2의 경제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를 진단하는 패러다임으로 주목을 받았던 위험사회론이 다시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때 한국사회는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로 무고한 시민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사고공화국이었으며 산업재해, 무더기 기업도산과 정리해고로 사람다운 삶을 영위하기 어려운 위험공화국이었다.

▼사고-결함 분석해 교훈 찾아▼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베크는 1986년에 펴낸 ‘위험사회’에서 현대 산업사회를 각종 불확실성이 상존하는 위험사고라고 규정하고, 그 대안으로 근대화에 대한 성찰적 비판을 제시했다. 베크는 1986년 4월 옛 소련의 우크라이나 북쪽에 있는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에서 원자로가 폭발해 동부 유럽을 순식간에 핵 재앙의 공포로 몰아넣은 사건에 자극 받아 서구 근대화가 이룩한 현대문명과 과학기술에 내포된 위험구조를 밝혀낸 것이다.

체르노빌 원전사고로 3만2000여명이 죽고 사고복구 작업에 동원된 40여만명의 노무자들이 방사선에 노출돼 사망자는 계속 늘고 있다.

과학기술로 인한 대형사고는 끊임없이 발생했다. 1979년 미국 스리마일 핵발전소 사고, 1984년 인도 보팔에서 독극물 유출로 빚어진 사상 최대의 산업재해, 1986년 1월의 미국 우주왕복선 챌린저호 폭파사고는 과학기술이 위험을 유발하는 요인의 하나임을 비극적으로 보여주었다. 1999년 9월 일본 이바라키현 도카이무라(東海村)의 우라늄 연료처리회사에서 방사능 누출사고가 일어났다. 1945년 연합군의 원자폭탄 세례를 받은 이래 발생한 최대의 피폭사고로 일본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이 사고를 계기로 2000년 1월 일본 과학기술청장관의 자문기관인 ‘21세기 과학기술 간담회’가 설치됐다. 이 간담회는 6월에 ‘실패학(失敗學)을 구축하자’는 색다른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일본기업은 사고가 발생하거나 제품의 결함이 생겨 회수하게 됐을 경우 덮어버리는 풍조가 있어 실패의 교훈을 살리지 못한다’고 지적하고 실패 사고 시행착오의 사례를 수집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사회 전체가 함께 나눠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체적 실천 방안으로 연구 개발, 생산, 관리 등의 실패 사례를 활용하는 연구회를 만들어 ‘실패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발전시킬 것을 주장했다. 과학기술에 관련된 실패와 사고를 감추지 말고 교훈을 공유하는 사회시스템을 만들어 국민생활의 안전을 보장하는 기술체계를 구축하자는 것이다.

과학기술청은 이 제언을 받아들여 2001년도 예산과 과학기술 기본계획에 실패학 연구를 포함시킬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의 실패학 연구는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무엇보다도 한국사회는 군사문화의 잔재인 성공 신화에 중독돼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으려는 노력을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고속전철사업, 용인 난개발, 전국민 연금 실시, 의약분업 시행 과정에서 보듯이 정부의 정책 실패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지만 실패의 내용과 문제점을 분석해 추후 반면교사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없다.

이러한 사회적 여건에서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가 정부 각 부처의 연구개발 사업 중에서 실패한 사업이 재발하지 않게끔 실패사업에 대한 평가를 수행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통령에게 과학기술 정책과 제도 발전에 관해 자문하는 정부기관에서 실패학의 중요성에 착안한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경제난 재발 방지에 큰힘▼

실패학이 과학기술분야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의 문제 해결에 확산돼 같은 실패가 반복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국민의 혈세나 다름없는 공적자금이 100조원 이상 투입되고도 금융구조 조정과 부실기업 정리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한 정책 실패의 책임소재를 낱낱이 밝혀 관련기관 임직원들의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로 멍든 서민들의 가슴을 어루만져주고 경제위기의 불안요인이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실패학을 통해 ‘창조적 실패’가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될 것을 기대해 본다.

이인식(과학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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