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육정수/'국민정서법'도 法이다

  • 입력 2000년 10월 29일 18시 56분


국민정서법. 이는 헌법이나 보통의 법률처럼 문자화된 ‘성문법(成文法)’이 아니다. 그렇다고 영국이나 미국의 ‘불문법(不文法)’처럼 돼있으면서 어떤 체계를 갖춘 것도 아니다.

실체가 잘 안잡히는 막연한 개념일 뿐만 아니라 일관성이 없고 때로는 변덕스럽기도 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항간에서 ‘헌법 위에 국민정서법이 있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국민정서법은 국회 등 입법에 관여하는 국가기관들이 공식적으로 논의해본 적도 없다. 어떻게 보면 도깨비 같은 존재다.

누가 ‘국민정서법’이란 말을 처음 썼는지 확실치는 않다. 집권층이나 법조계, 아니면 오피니언 리더층에서 만든 것이 아닌가 싶다. 검찰에서 정치적 사건 또는 정관계 인사의 연루의혹이 있는 사건 등을 수사할 때, 정부가 어떤 정책을 입안하거나 집행할 때 국민의 ‘심증’ 또는 ‘여론’을 일컫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법’이란 말은 법에 못지 않은, 또는 그 이상의 현실적 위력이 있다는 뜻에서 붙인 것으로 보인다.

법의 세계에서는 ‘엄격한 증거에 의한 합리적 판단’이 요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국민정서법은 그 결과를 쉽게 용납하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보면 법으로서의 요건도 갖추지 못하고 합리적 근거가 약한 국민정서법이 ‘법’일 리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국민의 정서를 바탕으로 한 국민정서법은 법 이상의 존재임에 틀림없다. 이것을 무시하다가는 ‘합법성’은 있을지언정 자칫 국민적 ‘정당성’을 잃을 수 있다.

지난해 일년 내내 정국을 뒤흔들었던 옷로비의혹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검찰은 이 사건을 ‘실패한 로비’라는 ‘대수롭지 않은 사건’으로 결론 내렸다. 결국 국민의 호된 질타를 받아야 했고 급기야는 변호사가 특별검사로 임명돼 재수사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 과정에서 김태정(金泰政)법무장관의 경질과 구속, 그로 인한 검찰 권위의 추락, 정권이 입은 타격 등은 국민정서법의 위력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최근의 신용보증기금 외압의혹사건도 비슷하다. 박지원(朴智元)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대통령공보수석비서관 시절 ‘일개 지점장’에게 대출보증 압력전화를 걸었는지 여부가 쟁점이었으나 검찰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결론 내렸다. 하지만 박전장관은 수사를 받기 전 이미 국민정서법에 의해 전격 사퇴해야 했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도 김, 박 전장관 모두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자세를 보였으나 국민정서법 앞에서는 도리가 없었던 것 같다.

이번 동방금고 사건도 검찰은 경제에 끼칠 악영향 등을 고려해 가급적 빨리 수사를 끝냈으면 하는 눈치다. 그러나 핵심의혹 사항인 금융감독원과 정관계 인사들에 대한 로비여부가 밝혀지지 않을 경우 국민정서법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고민인 모양이다.

요즘 경기 일산신도시 등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러브호텔 반대’캠페인도 국민정서법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국민정서법이 항상 옳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당국이 특정 사안을 판단할 때 국민정서법의 밑바닥에 깔린 본질과 핵심을 겸허히 읽어내려는 노력은 중요하다.

<육정수 사회부장>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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