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정구현]'세계화 바람'속 살아남기

  • 입력 2000년 10월 30일 18시 42분


필리핀의 조지프 에스트라다 대통령은 영화배우 출신으로 부통령 시절부터 험구와 수많은 스캔들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최근에 한 불법 도박조직으로부터 1000만달러의 뇌물을 받았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필리핀의 페소화는 폭락하고 금리는 폭등하는 등 필리핀 경제는 최악의 사태를 맞고 있다.

일부에서는 제2의 아시아 위기가 이번에는 필리핀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제기하기도 한다. 한 나라의 내부 부패가 국제자본에 의해서 무참하게 처벌받는 좋은 사례이다. 이것이 바로 글로벌화이다.

나라나 기업이나 제대로 하지 않으면 글로벌 자본은 여지없이 돈을 회수해 가고 그 기업이나 나라는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된다. 최근 국내 모 재벌기업이 지배가족이 관련된 주식거래를 잘못해서 투자자의 신뢰를 잃고 주가가 반토막이 된 것도 글로벌 자본의 규율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이다.

우리는 지금 그러한 시대에 살고 있다. 최근의 금융감독위원회 고위간부가 연루된 벤처기업의 로비 및 뇌물 사건도 그런 관점에서 매우 걱정되는 사례이다. 지난번 한빛은행 지점장이 관련된 불법대출과 정치인에 대한 뇌물 의혹사건, 이번의 사건을 놓고 볼 때 이 나라의 부패의 관행은 별로 변한 것이 없으며 우리는 아직도 지난번 경제위기로부터 제대로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문제는 한국의 이러한 부패 및 도덕적 해이는 결국 글로벌 자본으로부터 처벌받을 것이라는 점이다. 아니 이미 받고 있다.

금년에 상당수의 기업이 많은 이익을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가가 바닥을 기고 있는 것은 바로 한국의 정치경제 시스템의 비효율로 인한 소위 ‘코리언 디스카운트’가 그 원인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세계적으로 글로벌화에 대한 반대운동이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시위는 글로벌화의 어두운 면에 대한 항의이기도 하고, 또한 글로벌화가 국가와 기업과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행동양식과 규율에 대한 좌절감의 표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글로벌화는 돌이키기 어려운 추세이다. 문제는 세계 전체로 볼 때 국가가 200개가 넘지만 글로벌화에 제대로 적응해 나갈 수 있는 나라는 크게 잡아서 30개국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글로벌화에서 한 국가가 자기의 몫을 찾아 가지려면 최소한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첫째는 자국의 기업이 어느 정도의 경쟁력을 가져서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 남아야 한다. 두번째는 그 나라의 내부 정치경제 시스템이 효율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세번째는 그 나라의 인적자원이 우수하여 세계적인 토론과 사업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중에서 두번째의 시스템 효율화는 다시 세 가지의 제도적 장치를 요구한다. 하나는 정부가 효율적이고 깨끗해야 하고, 둘은 기업의 지배구조가 투명성과 경영책임을 보장해 주어야 하며, 셋은 노동조합이 기업의 성과 증진에 동참하는 협력적인 노사관계를 정립하여야 한다.

그런데 한국을 놓고 볼 때 이 세 가지의 제도적 기반이 모두 약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관료와 정치권의 부패는 최근의 사태가 보여주듯이 과거 그대로이다. 기업은 경쟁력도 약할 뿐만 아니라 지배구조도 이제 만들어 가는 초기 단계에 있다. 일부 노동운동은 여전히 이념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주인이 없는 조직에서 노조는 극심한 나눠 먹기를 통해서 조직의 자원 기반을 약화시키고 있다.

한국은 인적자원이 우수하고, 특히 지금 진행되고 있는 디지털혁명에서 앞서 갈 수 있는 여건을 갖고 있다.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세계화가 요구하는 정치경제 시스템의 정비를 서두른다면 세계화의 열매를 향유할 수 있는 30개 정도의 국가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지금의 상황처럼 위기가 반복되는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정구현(연세대 경영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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