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민병욱/'R.O.T.C.' 사회

  • 입력 2000년 10월 31일 19시 04분


"우리는 부정부패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싸그리 잊고서, 안으로 돈벌이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멸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출세의 지표로 삼는다. ….” 국민교육헌장을 풍자적으로 개작(패러디)한, 조금은 유치한 이 ‘국민부패헌장’은 지난 3월 시민운동가 등 38명이 한국사회를 집중적으로 진단해 펴낸 책의 뒤표지에 실려 화제가 됐다.

▷아무리 풍자시라 해도 너무 비꼰 것 아니냐는 비판이 당시엔 꽤 높았다. 하지만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양을 보노라면 그런 풍자가 나올 만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특히 “상납과 뇌물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배금주의에 참여하고 복종하는 국민정신을 드높인다”는 대목에 이르면 절로 쓴웃음이 나온다. 사회에 만연한 부패구조를 적절히 이용해 돈을 벌어야 불출소리를 안듣는다는 ‘한심한 논리’가 전혀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 세상이다.

▷30대초반 젊은이가 ‘무늬만 벤처기업인’으로 일찌감치 비리구조에 눈떠 수천억원을 벌어들였다가 패가망신한 사건이 터졌지만 사람들은 이제 크게 놀라지도 않는다. 어떤 이는 오히려 방송에 나와 천연덕스럽게 “그런 식으로 떼돈 버는 방법을 알았다면 나라도 한 1년 감옥갈 셈치고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니 ‘한국 사회는 R.O.T.C.사회(Republic of total corruption의 약어로 총체적 부패공화국이라는 뜻)’라는 자학적 우스개가 유행병처럼 번져나가는 것 아닐까.

▷문제는 이런 유의 인식이 사회 전반에 퍼지면 어떤 결과가 올 것이냐는 점이다. 학자들은 정직한 사람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돈 번 사람들을 보며 손해를 보았다고 느끼는 사회에서는 대부분 사람이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다고 말한다. 말 그대로 사회가 병든다는 것이다. 부패사건이 터질 때마다 온갖 설은 난무하지만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히 밝혀지지 않고 지나가면 우울증 증세는 더 심해질지 모른다. 이른바 ‘정게이트’ 수사가 대충대충 마무리될 것이란 소문이 나돌아 해본 얘기다.

<민병욱논설위원> min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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