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박살’ 메모와 예결위 거부

  • 입력 2000년 12월 3일 19시 26분


국회 예산결산위원회 회의장에서 지난 1일 포착된 한 삽화는 오늘의 용렬하고도 ‘이상한 정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회의 진행 책임을 진 장재식(張在植)예결위원장은 몰상식한 표현으로 메모를 작성해 같은 민주당의원에게 보내고, 이것이 기자의 카메라에 찍혀 신문에 공개되자 야당은 이를 빌미로 ‘예결위를 거부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도무지 국민의 눈으로는, 보통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한심스러운 모습이다.

우선 장위원장의 메모라는 것이 실로 내용과 표현에 있어서 가관이다. 그가 같은 여당소속의 김경재(金景梓)의원에게 몰래 보낸 메모에는 ‘오늘도 김용갑(金容甲)이 어떤 미친 발언을 할지 모르는데, 전일에도 우리가 얼떨결에 넘겼지만(김대중 정부가 김정일을 위한 정부냐고 말했음), 오늘도 그런 말이 나오면 강력히 항변하고 박살내주시기 바랍니다. 회의가 중단되더라도’라고 적혀있었다.

물론 김용갑의원의 거친 발언은 비판받아 마땅하고 국회의원으로서 적절한 상식의 대변이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명색이 여야 의원들의 한복판에서 중립적으로 원활한 회의 진행을 해나가야 할 위원장으로서 과격 발언에 쐐기를 박는다는 명목으로 예결위 중단 사태를 감수하더라도 강경 대응하자고 부추겨서야 될 말인가.

장위원장이 소속정당의 ‘감정과 위신’만을 고려해 상대당 의원의 과격 발언을 ‘미친 발언’이라고 하고, ‘회의가 중단되더라도 박살내라’고 주문하는 것은 분명 국회의원으로서나 위원장으로서의 자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행위다.

이 장위원장의 메모와 관련해 예결위 거부까지 운위하는 한나라당의 대응도 우습기 짝이 없다. 당사자인 김용갑의원의 신상발언으로 따지고 위원장의 과한 표현에 대해 사과 한마디 듣고 넘어가면 되는 것이지, 예산심의 보이콧을 주장하는 것은 모기를 보고 칼을 뽑는 이른바 견문발검(見蚊拔劍)식의 대응이다.

올해 정기국회는 검찰수뇌부 탄핵안 처리문제 등을 둘러싼 여야갈등으로 여러 날을 허송세월한 끝에 폐회일(9일)을 눈앞에 두고 있다. 남은 며칠이라도 100조원이 넘는 규모의 새해 예산안을 보다 깊이 있게 심의해야 한다. 여야의 부질없는 정쟁으로 졸속심의가 돼서는 안된다.

장위원장은 메모와 관련해 제대로 사과하고, 한나라당은 그런 메모 내용을 걸고 넘어져 예산심의에 연계하려는 속 좁은 발상을 거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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