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책]밀 보리 고구마… 그 속에 담긴 사연들

  • 입력 2000년 12월 8일 19시 05분


◇ 우리가 정말 알아야할 우리 농산물 백가지 / 이철수글 이원규 사진 / 320쪽 1만5000원 현암사

누렇게 익은 벼를 바라보던 할머니가 말했다. 보기만 해도 배가

절로 부르다고. 소시적에는 시집가서 밥 복 실컷 누리는게 소원이었다고. 여전히 그이에게 하얀 쌀밥 고봉은 복의 상징이다. 그런 쌀을 떡으로 과자로, 막걸리로 내돌리는 것은 천상(天上) 놀음이다.

이 책은 덕유산 자락 솔숲에서 우리 작물을 재배 전시하는 농사꾼의 거친 손으로 쓰여진 우리 농산물 이야기다. 벼 보리 고추 호박 감자 참깨 무 파…. 늘 우리 식탁에 올라 그 정겨움을 잊기 쉬운 벗들과 이 땅의 사람이 맺은 질기고 오랜 인연이 실렸다. 외제 밀가루에 쫓겨난 ‘밀’을 보자. 초봄에 뿌려져 ‘똥물’을 먹은 뒤에 하룻만에 키가 훌쩍 커버리는 사연, 초여름 깜부기병에 걸린 놈으로 깜뎅놀이하던 아이들 이야기, 밀가루로 만들어져 수제비로 일용되거나 밀주로 제조되는 사연까지를 아우른다.

오래전 고향을 떠난 이들이라면 책 갈피마다 흙밭에서 뛰놀았던 유년의 기억을 발견할 것이다. 보리띠를 깨는 ‘곰방메’, 옥수수를 볼가 먹고 남은 열매자루로 효자손으로 사용하던 ‘강탱이’, 불에 구운 뜨거운 자갈로 익혀먹는 ‘감자삼굿’, 소주 주정의 재료인 절간 고구마를 일컫는 ‘빼때기’, 밀이삭을 양손으로 싹싹 비벼서 나온 연두색 사리를 입안에 톡 털어놓고 씹었던 ‘밀껌’…. 새록새록 떠오르는 향수에서 추수 뒤 가득 채워진 뒤주를 기대고 서 있는 포만감을 맛본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녹색 정감’을 함께 나누길 바란다고 했다. “농사는 심성 고운 이들이 정담을 나누면서 생명을 이어가고,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일”이라고. 그래서 지상에 한 평의 땅뙤기가 없다면 마음의 텃밭이라도 일구자고 제안한다. 쌉싹머리 싸리울에는 호박을 올리고, 그 사이에 노란 병아리가 먹이를 뒤지게 하자고.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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