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의 대중문화 째려보기]어떤 경지, 신승훈님께

  • 입력 2000년 12월 8일 20시 43분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제법 쌀쌀합니다. 때 이른 크리스마스캐럴이 들려오는 걸 보니 이제 정말 겨울인가 봅니다. 어제는 신승훈님이 다녔던 충남대에 갔었습니다.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벤치에 나란히 앉아 속삭이는 캠퍼스커플을 보면서 신승훈님의 발라드 몇 곡을 떠올렸습니다. 신승훈님의 따스하고 맑은 감성들도 바로 이곳에서 키워졌겠지요?

신승훈님이 가요계에 발을 디딘 지도 벌써 10년이 흘렀네요. 쌍권총춤이 인상적이던 가수 심신님과 함께 세상에 선을 뵈었었지요?

솔직히 처음부터 신승훈님의 노래를 즐긴 것은 아니었답니다. '미소 속에 비친 그대'를 들었을 때는 가사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지요. 아둔한 탓인지 지금도 '내가 아는 사랑은 그댈 위한 나의 마음 그리고 그대의 미소 / 내가 아는 이별은 슬픔이라 생각했지 하지만 너무나 슬퍼'에서 '그대의 미소'와 '너무나 슬퍼'가 어디에 걸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사이에 패인 감정의 골이 까마득할 것이라는 짐작만 할 뿐이지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2집의 '보이지 않는 사랑'에서도 '보이지 않게 사랑할거야 너무 슬퍼 눈물 보이지만'의 역설이 때론 근사하게 때론 말장난처럼 느껴졌습니다. 발라드에서는 아름다운 선율만큼이나 사랑의 기쁨과 실연의 아픔을 담은 가사가 중요한데, 1집과 2집의 노랫말들은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듯하면서도 바로 이거다! 라고 다가오지는 않았었지요.

그리고 또 시간이 흘렀네요. 그 동안 신승훈님은 '널 사랑하니까'(3집), '그후로 오랫동안'(4집), '나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니가 있을 뿐'(5집), '지킬 수 없는 약속'(6집)을 연이어 발표하며 '발라드의 황제'란 닉네임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곱상한 외모에 맑은 음색을 지닌 스무 살 이쪽저쪽의 미소년들이 하루가 멀다 않고 발라드계로 뛰어들지만, 싱어송라이트이면서 가창력까지 겸비한 신승훈님과 견줄 가수는 아직 없는 것 같습니다.

7집을 발표한 다음부터는 유독 지난 10년에 대한 회고를 많이 하더군요. 그 회고담 속에는 6집까지 신승훈님이 만든 노래들의 영감이 되었던 옛사랑에 대한 추억이 들어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TV, 얼굴'에서도 '김혜수의 플러스 유'에서도, 신승훈님은 옛사랑과의 눈부신 사랑과 가슴 아픈 이별, 언뜻 스쳐 지나갔던 재회의 순간들을 차분히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그녀를 떠올리며 노랫말과 곡을 만들지 않겠노라고 선언을 하듯 다짐하였지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텔레비전에 나와서 저렇게 옛추억을 더듬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지금까지의 삶과 노래활동에 어떤 매듭을 지으려고 하는 게 아닐까? 20대의 사랑을 접고 새로운 사랑을 꿈꾸겠다는 의지의 표현일까 아니면 아직도 미련이 남았다는 반증일까? 옛사랑에 대한 감정을 완전히 접은 다음에도 새로운 사랑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과연 그는 계속 발라드를 만들고 노래할 수 있을까? 물론 감정이입을 하며 멋지게 연기하듯 노래하는 발라드 가수들도 많지만, 적어도 신승훈은 자신의 경험에 두 발을 딛고 그 경험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진심을 노래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별 그후'를 들었습니다. 당연히 저의 억측이지만, 이 노래는 텔레비전 앞에서 옛사랑을 이야기할 때 신승훈님의 심정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거기, 사랑을 잃고 홀로 슬퍼하는 한 남자가 있더군요. 그에게 지나간 청춘의 나날들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닌 날들 / 웃어도 웃는 게 아닌 시간'이었겠지요. 가슴이 콱 막히면서 눈앞이 아득해졌습니다. 실연의 고통을 이보다 더 절절하게 표현한 말이 어디 있을까? 1집과 2집에서 모호한 노랫말들로 인해 힘겨워하던 신승훈님의 음악세계가 10년이 지난 7집에 와서는 김소월과 한용운을 잇는 연시(戀詩)의 '어떤 경지'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10년 동안 한 우물만을 판 결과이겠지요.

사랑의 기쁨과 아픔은 예술의 영원한 주제입니다. 신승훈님에게 하루 빨리 눈부신 사랑이 찾아들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숨쉬는 동안은 잊지 못할 / 더없이 사랑했었던 너'에 대한 슬픈 그리움만큼이나 사랑의 기쁨을 노래하는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고 싶네요..

출근길, '이별 그후'와 '가잖아'를 들으며 빠져들었던 아득함과 그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를 이성복님의 시 한 편으로 대신할까 합니다.

비 오는 날 차 안에서

음악을 들으면

누군가 내 삶을

대신 살고 있다는 느낌

지금 아름다운 음악이

아프도록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곳에서

내가 너무 멀리

왔다는 느낌

굳이 내가 살지

않아도 될 삶

누구의 것도 아닌 입술

거기 내 마른 입술을

가만히 포개어본다

--이성복, '음악'

소설가 김탁환(건양대 교수) tagtag@kytis.konyang.ac.kr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