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며 생각하며]임영순/의문사 밝혀야 재발 없다

  • 입력 2000년 12월 13일 18시 35분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식이 며칠 전에 있었다. 이 상은 ‘민주주의를 위해 함께 싸워온 국민 모두가 수상하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는 글을 읽곤 한다. 옳은 얘기다. 그런데 진정 우리 모두가 노벨평화상 수상의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 먼저 풀어야 할 숙제가 한가지 있다. 바로 과거 민주화 과정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죽음에 얽힌 숨겨진 진실을 밝혀내는 일이다.

▼가해자들 고백-참회땐 관용▼

과거 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었다. 그 중에는 어떻게 죽었는지, 왜 죽었는지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의문의 죽음’들이 적지 않다. 사회 지도급의 저명인사를 포함해 군인 학생 노동자 등 각계에서 민주화를 위해 애쓰던 이들의 죽음은 모두 공식적으로는 자살이나 사고사로 발표됐으나 의혹을 남긴 채 오늘날까지 ‘의문사’로 불려왔다.

유가족과 사회단체들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의문사의 진상을 밝혀줄 것을 호소해왔고 마침내 10월 17일 의문사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 대통령 소속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발족이 그것이다.

1월 15일 공포된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출범한 진상규명위원회는 9명의 위원과 50여명의 민 관 군 합동조사단으로 구성돼 12월 31일까지 의문사에 대한 진정을 받아 그에 대한 진상규명 활동을 하게 된다.

위원회의 출범은 여러 가지 면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우선 국가가 나서서 과거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침해의 진실을 밝히는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인권을 보호할 의무를 갖는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그러나 과거 우리 사회에서는 이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이 있었다면 사실대로 밝히고 바로잡는 일에 나서는 것은 국민에 대한 국가의 기본 의무를 되찾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의문사의 진상을 규명하는 활동은 피해자들의 인격과 명예를 회복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 가족들의 고통을 사회 전체가 함께 위로하는 일이기도 하다. 더욱 중요한 의미는 의문사 진상규명이 또 다른 의문사에 대한 ‘예방조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의문사’와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그 진실을 밝히고, 의문사를 가능하게 만든 사회의 구조나 제도를 개선하는 데 토대가 된다는 뜻이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위원회는 과거 의문사에 개입한 가해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진실을 밝히고 과거를 참회하면 관용과 용서를 베푼다는 방침을 갖고 있다.

일각에서는 위원회가 이렇게 막중한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우려를 나타내기도 한다. 실제로 예상되는 대부분의 진정사건들이 1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난 경우여서 증거자료 수집이나 증언 확보 등 조사에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 또 한 사건에 주어진 6개월이라는 조사기간도 조사활동에 나서는 사람들에게 현실적인 부담이 되기도 한다. 유가족과 사회단체 쪽에서는 위원회의 권한을 강화하는 법개정 운동을 시작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한 사건에 6개월' 시간 부족▼

필자의 경우도 역사적인 임무를 맡았다는 부담과 함께 ‘내가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인가’를 자문하곤 한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겠다는 생각만큼은 확고하다. 다른 조사관들도 다르지 않을 것으로 안다.

1989년 한 장의 사진을 통해 처음으로 ‘의문사’라는 것을 접했다. 불거져 나온 눈, 터질 듯 부풀어오른 몸, 불에 그을린 듯 새까만 피부. 어느 대학의 운동권 학생이라는 그의 주검은 나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당시 그의 죽음은 ‘익사’로 공식 발표되었다. 자살이든 타살이든 최소한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 ‘의문사’라는 꼬리표를 붙여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나 필자는 의문사의 진실을 밝히는 일에 참가하게 됐다. 그때 그 사건을 직접 조사하게 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의문사는 없어야 한다’는 변함 없는 생각으로 조사에 임할 생각이다.

임영순(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민간조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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