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훈의 세상스크린]먹다남은 술 선물

  • 입력 2000년 12월 13일 18시 53분


저를 영화배우로 발탁해 주시고 처음으로 인정해주신 이황림 감독님은 제게 두고두고 소중한 분입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지금도 종종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는 편입니다.

15년전 영화배우가 된 후 첫 명절날 감독님 댁에 인사를 드리러 간 적이 있습니다. 크지는 않더라도 성의로 조그만 선물을 하나 준비해야겠는데 신인 배우시절 그다지 돈에 여유가 없어 고민하던 중 마침 술 한병이 집에 있다는걸 알게 되었습니다. 문방구에 가서 정성껏 포장을 한 다음 감독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몇 달후 우연한 기회에 감독님께서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중훈아! 일전에 주고간 술 잘 먹었다. 그런데 다음부터는 주려면 따지않은 술을 주겠니?”

알고 보니 선친께서 이미 반병쯤 드셨던 술을 확인하지 않고 그냥 포장해서 선물했던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감독님이 저를 자식처럼 생각해주시고 후에라도 웃으며 말씀해 주셨길래 그나마 다행이지 다른 경우였으면 그냥 모르고 지나쳐 ‘돌이킬수 없는 결례’가 될 뻔 했습니다.

작년 크리스마스때 제 꼬마녀석에게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뭘 선물하면 제일 좋겠냐고 물었더니 퍼즐과 초콜릿을 주었으면 제일 좋겠다고 했습니다. 빨간 양말을 벽에 걸어두고 아침에 일어난 꼬마녀석은 퍼즐과 초콜릿을 확인하고는 산타할아버지께 감사하며 뛸듯이 기뻐했습니다. 산타할아버지는 그 녀석이 원하는 퍼즐을 주었고 또 반쯤 먹었던 초콜릿이 아닌 새 초콜릿을 선물하여 녀석을 기쁘게 해주었습니다. 선물의 의도와 결과가 잘 맞아 떨어진 경우였습니다.

또다시 한 해를 마감하는 요즘 소중하고 감사한 사람에게 마음이 담겨있는 선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선물은 그 자체보다 그 선물을 그 사람에게 주기 위해 생각하고 시간을 보낸 정성이 중요한 것이겠지만 그래도 아이에게 술을, 감독님께 초콜릿을 선물할 수는 없을 겁니다. 정성 못지않게 이왕이면 선물도 기쁜 것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는 무더웠던 지난 여름부터 바로 얼마전까지 영화 ‘불후의 명작’이라는 선물을 조심스럽게 고르고 정성스럽게 포장했습니다. 이제 23일 관객여러분 댁에 감사의 인사와 함께 전달하는 일만 남은 요즘, 혹시 먹다남은 술같은 선물이 되지나 않을까 무척이나 초조합니다. 저의 정성만큼이나 관객들께 기쁜 선물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산타할아버지는 저와 달리 올해도 마음이 편할 겁니다. 우리 꼬마녀석이 올해는 사탕과 풍선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고 싶다고 산타할아버지께 미리 말을 해버렸거든요.

joonghoon@seromesof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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