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사람세상]"세상보는 눈 넓어지니 바둑실력도 쑥쑥"

  • 입력 2000년 12월 13일 19시 06분


“무제두나로드느이 그로스 마스테르.”

러시아인들은 바둑 아마기사인 이혁씨(36·아마 5단)를 이렇게 부른다. 영어로는 ‘International Grand Master’, 우리 말로 옮기면 ‘국제적 (바둑)최고수’정도 될까. 러시아 바둑팬들이 이씨를 깍듯이 대접하기 위해 만들어낸 조어(造語)다.

이씨는 96년 유럽 바둑선수권대회에 홀연히 등장해 3등을 한 뒤 97, 98, 2000년 대회에서 우승하며 바둑계를 평정했다. 특히 97년 우승 당시 유럽 바둑계의 1인자로 이 대회에서 4연패 했던 중국 프로 5단 출신의 궈주엔(郭鵑·여)을 눌러 파란을 일으켰다. ‘한국 아마가 중국 프로를 눌렀다’는 것이 유럽인들에겐 놀라움 그 자체였던 것.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이씨는 91년 러시아로 건너가 박사학위를 받고 국립과학아카데미 산하 모스크바 정치경제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다 현재는 개인 사업을 준비하기 위해 일시 귀국 중이다.

“유학간 뒤 5∼6년간은 공부하느라 바빠 바둑대회는 커녕 바둑책 들여다 볼 시간도 없었어요. 96년 학위를 받고 나서 러시아 국내대회부터 참가했는데 연전연승이었죠.”

이상한 일이었다. 바둑 공부를 거의 하지 못했는데 바둑 실력은 국내에서 받았던 아마 5단보다 오히려 늘어있었던 것. 넓은 세계에서 넓은 시야를 갖다보니 바둑이 저절로 는 것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러시아인들은 굉장히 자존심이 강해서 그런지 처음엔 저를 상수로 받아들이지 않더군요. 러시아인 1인자에게 호선으로 10연승을 거둔 뒤에야 상수로 인정해요. 그 뒤부턴 언제 그랬냐싶게 정말 깍듯이 상수 대접을 하더군요. 그게 러시아인이 특질인 것 같아요.”

그가 러시아 바둑계에서 특별히 존경받는 이유는 단지 실력이 세서만은 아니다. 그가 모습을 나타낸 뒤로 러시아의 바둑 실력이 자타가 공인하는 유럽 최고가 됐기 때문. 이씨는 주말마다 바둑대회가 열리는 지방에 찾아가 지도 다면기 등을 둬주고 아마 5단의 정상급들과 수시로 대국을 갖는 등 ‘고수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게 임했다.

“고수라고 해서 잘난체하기 보다는 ‘내가 바둑을 조금 더 잘 두는 사람이니까 조금 못두는 사람에게 당연히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바둑을 통해 배운 세상사의 교훈이기도 합니다.”

또 천풍조 7단과 함께 10대 유망주였던 샤샤, 스베타를 발굴해 한국으로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99년 유럽대회에서는 그 샤샤에게 져 준우승을 했지만 올해 설욕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바둑으로 러시아 사람들과 인간적 교류가 가능했고 이곳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바둑은 약이 될 수도, 마약이 될 수도 있는데 바둑의 긍정적인 측면을 자기 것으로 만들면 인생이 풍요로워 지고 즐거워집니다.”

<서정보기자>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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