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관아에서는 곡식을 풀어주었으나 많은 기민을 구제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조정에서는 육지에도 흉년이 든 처지였으나 '제주도는 외로운 섬'이라 하여 특별히 구휼미를 내서 배에 실어보냈는데 마침 풍랑이 일어 하릴없이 돌아왔다.
제주도 사람들은 베개를 나란히 베고 굶어 죽어갔다. 그런데 육지에서는 곡식 실은 배를 돌린 뒤에 다시 곡식을 보내주지 않았다.
이럴때에 김만덕이 발벗고 기민구제에 나섰다.김만덕은 재산을 몽땅 털어 뱃사람들을 고용하여 육지로 보냈다. 뱃사람들은 육지에 올라 닥치는 대로 곡식을 사모아 제주도로 돌아왔다.
김만덕은 이 곡식의 십분의 일쯤을 덜어내서 가까운 일가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나머지 곡식은 몽땅 제주 관아로 보내 부황에 뜬 기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게 하였다.
제주관아의 뜰에는 기민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아우성을 쳤다. 그들은 곡식을 받아들고 주린배를 채웠다.
곡식을 마련해 준 장본임이 만덕임을 알고 사람들은 "만덕이 우리를 살렸구나"라고 외치며 그녀를 칭송하였다.그녀가 20세가 되어 기적에서 벗어났다.
그녀는 과부처럼 혼자 살면서 장사길에 나서 큰 부자가 되었다.18세기 도시의 상업적 분위기를 타고 치부하였을 것이다.
아무튼 만덕의 소문은 정조임금에게도 알려졌다. 정조는 제주목사에게 그녀의 소원을 무엇이든지 들어주라고 분부하였다.
만덕은 "큰 소원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서울 나들이나 한번 해보고 금강산 구경이나 다녀왔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대꾸하였다.
만덕은 의녀의 직함을 받아 잠시 궁중생활을 하다가 금강산을 돌아보고 1년쯤 지나 제주도로 돌아갔다.
당시 체제공은 그녀를 잘 돌봐주었고 그녀가 떠나갈 적에 <만덕전>을 지어 그녀에게 선물로 주었다. 제주도 사람들은 만덕을 구세주처럼 모시면서 제주도의 표상으로 여겼다.
이렇게하여 만덕의 명성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이이화/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