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동안의 스위스 생활이 즐거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독일에서 아이를 끼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부담 때문이겠지요. 짐을 모조리 바나나 상자에 꾸려 운송회사로 보내고, 남은 전화비를 내러 전화국에 갔습니다. 개설할 때 낸 보증금을 주면서, 이자까지 돌려주더군요. 남은 스위스 프랑으로 독일에서 입을 남편 바바리 사고, 꿈에도 잊지 못할 스프륑글리 쵸컬릿 사먹고, 스위스 은화 몇 닢은 추억으로 남겨 둡니다.
취리히 공항에서 스위스와 아쉬운 작별. 두 시간 남짓 비행하다 땅을 내려다보니, 어느새 군대 사열하듯 나란히 줄지어 선 독일식 가옥이 호반을 장식합니다. 국제화된 취리히에서는 그나마 학교에서 배운 영어와 불어로 버텼는데, 구텐탁(Guten Tag) 수준의 한심한 독어로 어떻게 버틸지...
우리가 도착한 독일의 도시 하노버(Hannover). 마침 하노버 엑스포 2000 준비로 분주한 때였습니다. 늘씬한 유리 빌딩들이 부유한 비즈니스 도시의 멋을 물씬 풍기고 있습니다만, 그 이면에는 2차 세계대전으로 도시의 90% 이상이 파괴된 전흔의 아픔이 숨겨져 있지요. 외곽과는 달리 도심으로 갈수록, 아기자기한 옛 독일식 가옥과 교회들이 눈이 들어오기에 신기했는데, 모두 재건축 한 것이랍니다. 이렇게 도면 그대로 벽돌 한 장 한 장을 쌓아 올려 되살린 수많은 문화재들을 독일 전역에서 볼 수 있다고 하더군요.
우리가 머물게 된 기숙사의 이름은 라이프니찌 하우스(Leibnizhaus). 컴퓨터, 전자계산기의 원리를 발명한 철학자 라이프니찌가 거주했던 곳으로 하노버가 자랑하는 관광명소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하노버 대학을 방문하는 외국 교수 기숙사로 사용되고 있어, 저녁이면 세계 각국의 향신료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지요.
말끔히 청소된 스튜디오. 책상 위에 종이 몇 장이 놓여져 있기에 읽어보았습니다. 한 장은 환영한다는 인사, 또 한 장은 우리 가족이 묵게 될 기숙사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책자, 나머지 하나는 이 집의 세간목록이군요.
그런데, 세간 목록이라는 것이 무려 5장입니다. 부엌부터 한번 볼까요... 부엌 서랍을 연 순간, 헉하고 숨이 막혀옵니다. 스푼, 포크, 나이프는 의장대 사열하는 형상으로 서있고, 빳빳하게 풀 먹인 행주에는 손이 베일 정도입니다.
욕실 수건도 손수건, 몸수건, 목욕수건으로 나뉘어 20장씩. 각 수건 하나 당 분실할 경우 벌금 금액까지! 목욕수건으로는 절대 손을 닦으면 안될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침대 시트 10장, 한 침대 당 베개가 두 개니까 베개 커버 20장. 그런데 이건 기계가 접었나? 내가 풀었다가 다시 접으려니 아까 처럼 딱딱 각이 맞지 않습니다. 잘 때도 반듯이 누워 자고, 텔레비전을 좋아해서 텔레토비라 불리는 나우 아빠도 이제는 반듯이 앉아 시청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낡은 것도 완전히 숨을 거두기 전에는 버리지 않는 경제관념도 눈에 보이는군요. '그때를 아십니까'에서나 볼 수 있는 깡통 따는 기구는 반짝반짝 빛이 나고, 쓰레받기는 박물관으로 가야 할 것 같은데도 번듯이 벽에 붙어있습니다. 청소기가 덜덜거려 관리인 자이펠트씨에게 바꾸어 달라고 하니, 5년밖에 안되었는데 이상하다며 청소기를 들여다봅니다.
이를 어쩌나...스위스에서 부친 우리 이삿짐이 까다로운 독일세관원이 추가 서류를 요구하는 바람에 일주일이나 늦게 받게 된다는군요. 답답해서 시원한 국물이라도 먹으면 좋겠는데, 하나 밖에 없는 국수집은 저녁 시간까지 문을 닫아걸었습니다.
길거리 포장마차인 임비스에서 먹을 것이라고는 50센티 소시지뿐... 빵에 소시지를 끼워 먹는 것인지, 빵이 소시지를 잡는 손잡이인지 알 수 없을 정도죠. 더 속이 타서 그네들이 마시는 하노버 맥주를 따라 마시는데, 씁쓸한 북부 독일 맥주 맛이 독일 땅을 밟았음을 실감케 합니다.
은행은 오후 1시 30분에 문을 닫아 버린 상태이고, 밥을 해먹으려니, 쌀을 사러 10분 걸어야 합니다. 나우 아빠가 어깨에 힘주며 '내가 먹거리를 구해 오지' 큰소리를 치고 나서더니 10킬로 쌀자루를 등에 지고 돌아왔습니다. 서울 같으면 쌀 왔어요! 배달은 물론이고, 이도 저도 싫으면 멋진 퀵서비스 아저씨라도 나타나 주겠건만...
짐정리 하며 새벽을 맞이합니다. 문득 쏟아지는 빗소리에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빗속을 달리는 자전거. 댕댕댕 마크트 키르히의 교회 종소리. 내일은 나우의 놀이방에 면담을 가야 합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놀이방이지만, 새 친구들을 만난다며 즐거워하는 나우가 안쓰러워, 차버린 이불을 꼭 덮어줍니다.
나우엄마(nowya2000@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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