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억원짜리 스포츠카가 동나고 티파니의 다이아몬드 매장이 연인들로 북적대지만 신기한 것은 ‘없는 사람들’이 비난은커녕 부자들의 흥청거림을 대단한 구경거리로 여기고 신이 나서 ‘관람’에 몰두한다는 것이다.
빌 게이츠가 시애틀 호숫가에 4000만달러(약 480억원)를 들여 건평만 1000평이 넘는 초현대식 주택을 지었을 때도, 도널드 트럼프가 새 연인을 맞아 우리 돈 60억원짜리 호화판 결혼식을 가졌을 때도 미국 서민들은 부자들이 세우는 새로운 기록에 감탄할 뿐 빈정거리지 않았다.
▼美 기부문화 '사회의 소금'▼
억만장자들의 이질적인 놀음을 사회가 용인하고 나아가 함께 즐기는 이 독특한 분위기는 어디서 기인한 것인가. 여러가지 분석이 있겠지만 돈에 대한 미국 부자들의 건전한 인식이 사회적 포용을 이끌어 내는 주동력은 아니었을까.
“부자로 죽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평생 모은 돈을 몽땅 사회에 내놓고 떠난 강철왕 카네기에서 시작해 올들어 공휴일을 빼면 하루 평균 1000만달러(약 120억원)씩을 지구촌 음지에 기부해온 빌 게이츠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부자들은 더불어 사는 방법을 현명하게 실천하고 있다. 재산의 사회환원을 덕목으로 여기고 그것을 습관처럼 실천하면서 그들은 이 나라에서 존경과 감사의 대상이 된 것이다.
록펠러재단이 장학생 1만명을 공부시켜 무려 60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것이나 빌 게이츠의 도움으로 300만명의 빈민이 디지털 디바이드(인터넷혜택의 빈부격차)를 극복하고 있는 것은 미국식 기부문화의 소중한 결실들이다. 많이 가진자는 덜 가진자에게, 덜 가진자는 더 못 가진자에게 베풀며 사는 과정에서 이 나라는 새로운 풍요를 창출하고 사회에 대한 믿음을 형성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는 어떤가.
우리나라에서 부자에 대한 시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 있다. 김영삼 전대통령의 “가진자가 어떻게 고통을 받는지를 보여주겠다”는 발언이 그것이다. 부자뿐만 아니라 부유해지기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에게 공포와 체념을 안겨줄 수 있는 말이었다. 얼마를 갖고 있으면 고통받는 대상이 되는지, 또 왜 단순히 부자라는 것 하나만으로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표현은 거칠었지만 그러나 국민적 여론을 대신했을 뿐이라는 점에서 김전대통령의 말만 탓할 일은 아니다. ‘부잣집’에서 자라 대통령이 된 사람조차 더 가진자에게 그런 생각을 할 정도라면 이 나라에서 빈자들이 부유층에 느끼는 부정적 감정은 그 골이 얼마나 깊을지 가슴 섬뜩하다.
문제는 명색이 자본주의를 한다는 나라에서 왜 부자가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느냐는 점이다. 과거 정경유착으로, 탈세로, 변칙상속으로 치부를 한 사람들이 사회지도층입네하고 못사는 사람 업신여기면서 끼리끼리만 잘난 인생을 즐기던 데서 비롯됐을지도 모른다.
물론 정치자금이다 로비자금이다 해서 준조세 성격으로 거액을 뜯기다 보니 재벌들에게 자발적 기부는 감각 저 너머의 일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특정이익을 위해 특정집단에 보낸 돈은 공동체의 존립을 위해 내놓는 자선과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富의 혜택 함께 누려야▼
지금이라도 이 나라에서 부자들이 빈자들의 존경을 받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싶다면 여기 간단한 방법이 있다. 번 돈의 혜택을 함께 누리는 길을 택하면 되는 것이다. 돈은 배설물 같아서 쌓아두면 악취가 나지만 뿌리면 거름이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걸 실천하기에 지금은 얼마나 좋은 계절인가.
덧붙이자면 베품의 미덕, 나눔의 지혜는 재벌들한테만 국한된 일이 아니다. 부자냐 아니냐는 스스로 느끼는 상대적 개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주말 사회단체나 종교기관 그리고 가까운 양로원이라도 찾아서 사회에 ‘거름’을 내놓는다면 부자든 빈자든 우리 모두는 이 겨울 한철을 푸근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이규민<논설위원>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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